서울을 품은 사람들 1, 2
김종길 구인환 김우종 외 지음. 문학의집·서울 펴냄. 비매품
김종길 구인환 김우종 외 지음. 문학의집·서울 펴냄. 비매품
문인 156명이 쓴 ‘내 작품 속의 서울, 지금은 어떤가’
메뚜기 잡다 일본 아이들과 패싸움 벌이던 강민의 신당동
이세기·황순원 다니던 청계천의 음악카페 ‘템테이션’
막걸리 마시고 ‘라 마르세예즈’ 부르던 이가림의 남산길
메뚜기 잡다 일본 아이들과 패싸움 벌이던 강민의 신당동
이세기·황순원 다니던 청계천의 음악카페 ‘템테이션’
막걸리 마시고 ‘라 마르세예즈’ 부르던 이가림의 남산길
서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해 10월의 청계천 복원이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청계천의 다리 11개를 소재로 삼은 소설들이 새로 창작되어 ‘맑은내소설선’이라는 이름으로 선을 보였다. 남산 아래 옛 안기부 공관에 들어선 ‘문학의 집·서울’(이사장 김후란·02-778-1026)이 개관 5주년을 맞아 펴낸 <서울을 품은 사람들 1, 2>(비매품) 역시 서울의 역사와 현실에 바치는 문학적 헌사라 할 법하다. 황금찬 김종길 전숙희 김여정씨 등 원로 및 중견 문인 156명이 ‘내 작품 속의 서울, 지금 그곳은 어떤가’라는 주제로 쓴 글들이 묶였다.
소설가 송원희씨의 고향은 광화문 뒷골목 적선동 내수동 내자동 어름이다. 지금은 거대한 빌딩과 아파트들이 들어선 그 자리는 본래 오밀조밀한 한옥촌이었다. 아침이면 두부장수의 종소리와 물장수의 물지게 소리가 잠을 깨웠고, 낮에는 채소며 생선 장수가, 밤이면 만두를 파는 고학생들이 지나다녔다. 두 개의 나무토막을 따악 따악 치며 밤 골목을 지켜준 방범원 ‘딱딱이’들도 있었다. 당시 광화문 네거리에는 작은 구멍가게들이 즐비해서 아이들의 놀이마당으로 구실했노라고 송씨는 증언한다.
수필가 전숙희씨는 “계동에서부터 안국동을 지나 종로를 건너면 덕수궁 뒷길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을 걸어서 정동의 이화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회고한다. “검정 치마에 자주색 무명 저고리, 자주색 댕기” 차림인 여학생들이 지나가면 이웃 배재 학생들은 “우리 배재학당, 이화학당 연애합시다. 연애하고 연애하고 결혼합시다!” 큰소리로 노래하듯 외쳤다나. 그러나 그런 청춘의 자유로운 분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정동 골목 안에 있던 법원으로는 오랏줄에 묶인 반역자(=독립운동가)들이 들어가고 나왔으며, 그 모습을 보면서 소녀는 “분노와 아픔에 가슴이 떨리곤 했다.”
서울의 과거·현재 ‘다리놓기’ 붐
지금의 오장동에서 태어난 시인 강민씨는 서울 변두리 신당동 장충초등학교에 다녔다. 주변에는 배추밭이 많았고 학교 앞에는 냇물이 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건너편에 있는 지금의 청구초등학교는 당시 일본 아이들이 다니던 사쿠라오카(櫻丘)초등학교. “냇물에서 물고기, 올챙이를 잡고, 풀밭에서는 메뚜기, 잠자리 따위를 잡으며 놀”던 아이들은 간혹 일본 아이들과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배우개’의 청계천 주변, 멀리는 청량리를 거쳐 물고기 잡이를 갔던 중랑천, 신설동 경마장 뒤의 미나리밭, 왕십리의 살곶이다리 주변, 매미, 참새, 토끼몰이에 몰두하던 남산… 이 모두가 추억이며 내가 계속 써야 할 작품의 소재다.”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서울의 관광 명소 인사동의 옛모습은 수필가 고임순씨의 작품들에 고즈넉이 남았다.
“50년대 후반, 인사동에서 가끔 긴 담뱃대를 물고 양반걸음으로 활보하는 갓 쓴 할아버지와 만날 때도 있고 쪽찐 아낙네들이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모습과도 마주쳤다. 길모퉁이에 신문지를 깔고 붓 서너 자루와 <토정비결> <육전 소설> 책을 놓고 파리를 쫓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인의 모습도 정겨웠던 길.” “내 젊은 시절의 생각이나 정서는 서대문 밖에서 키워지고 단련된 것”이라 말하는 소설가 김용성씨는 등단작 <잃은 자와 찾은 자>(1961)를 비롯해 <도둑일기> <슬픈 양복 재단사의 나날> 등의 작품에서 자신의 성장지인 서대문 밖 현저동과 무악재, 영천시장,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등을 배경으로 등장시켰다. 1960년대에 전찻길이 없어진 데 이어 1978년 고가도로가 세워지면서 독립문이 원래 자리에서 서북쪽으로 80미터 옮겨졌으며 서대문형무소는 역사관으로 바뀌는 바람에 이제는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소설가 김녕희씨는 중편소설 <유성의 시>(1972)에서 돌체와 세시봉, 동화음악실 같은 명동의 음악실로 커피를 마시러 다녔던 전후파 여대생들을 등장시킨다. 소설가 이세기씨는 복개 직후 청계천에 들어선 음악카페 ‘템테이션’에 소설가 황순원 선생과 <현대문학> 편집장 김수명씨와 함께 다니던 시절을 아스라이 회고한다. 복개되기 전 3층짜리 판잣집들이 들어서 있던 시절의 남루한 청계천 풍경은 소설가 구인환씨의 <판잣집 그늘>에 잘 그려져 있다. “청계천! 맑은 물이 흐르고 가로수가 늘어서고 가로등이 조는 연도를 젊은 쌍쌍이 아베크 하는 동경의 냇가이어야 할 게 아닌가. 체!” 주인공인 상이군인은 이렇게 개탄하는데, 그가 체념하듯 읊조린 청계천변의 꿈 같은 풍경은 지금 어느 정도 실현된 것일까. 이가림씨의 시 <우리들의 둥지>는 “명륜동 앞길로 전차가 지나다니고/구멍 뚫린 카키빛 작업복 주머니 속에/등사판 잉크 냄새 풍기는 교재를/세기아(世紀兒)처럼 꽂고 다니던 시절”을 노래한다. 고향 전주를 떠나 서울로 진학한 시인은 친구들과 막걸리를 한 동이씩 마시고는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고래고래 부르며 남산 꼭대기까지 올라가고는 했다고. ‘천변풍경’ 현장답사편 ’서울 랩소디’ 시인 김후란씨는 청계천 수표교에 얽힌 흥미로운 사연을 들려준다. 인사동에 살면서 교동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인은 “다리 난간에 촛대 모양의 돌기둥이 줄지어 있”던 예쁜 돌다리 수표교를 지나가곤 했다. 그러던 그가 노년에는 장충단 근처에 살면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진 수표교를 손주들과 함께 거니는 것으로 인연을 이어간다.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자신들의 삶과 문학에 버무려 더듬은 문인들의 심정은 아마도 소설가 윤후명씨의 단편 <서울 랩소디>에 적절히 요약되어 있을 법하다. 박태원 소설 <천변풍경>의 현장을 답사하는 소설가가 주인공이다. “아름답고 깊이 있는 공간에 내 삶을 놓고 싶다. 우리들 모든 일회성 삶에 영원성을 담보하는 도시 공간을 꿈꾼다. 순간, ‘천변’의 백 년, 2백 년 된 고전적 카페에 앉아 한 줄의 명문을 쓰고 있는 나를 꿈꾼다. 그렇다면 제목은 또 다른 <천변풍경>이 되어도 좋으리라 가늠하면서…” ‘문학의 집·서울’은 27일 오후 2시부터 ‘2006 서울문학인대회’를 열어 ‘우리의 서울, 문학적 생태와 역사’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하고 ‘문학과 평화와 자연을 위한 2006 서울문학인대회 선언문’을 채택한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청계천 복원을 전후해서 서울의 과거의 현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문인들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서울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다. 사지은 복개되기 전 청계천 빨래터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50년대 후반, 인사동에서 가끔 긴 담뱃대를 물고 양반걸음으로 활보하는 갓 쓴 할아버지와 만날 때도 있고 쪽찐 아낙네들이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모습과도 마주쳤다. 길모퉁이에 신문지를 깔고 붓 서너 자루와 <토정비결> <육전 소설> 책을 놓고 파리를 쫓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인의 모습도 정겨웠던 길.” “내 젊은 시절의 생각이나 정서는 서대문 밖에서 키워지고 단련된 것”이라 말하는 소설가 김용성씨는 등단작 <잃은 자와 찾은 자>(1961)를 비롯해 <도둑일기> <슬픈 양복 재단사의 나날> 등의 작품에서 자신의 성장지인 서대문 밖 현저동과 무악재, 영천시장,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등을 배경으로 등장시켰다. 1960년대에 전찻길이 없어진 데 이어 1978년 고가도로가 세워지면서 독립문이 원래 자리에서 서북쪽으로 80미터 옮겨졌으며 서대문형무소는 역사관으로 바뀌는 바람에 이제는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소설가 김녕희씨는 중편소설 <유성의 시>(1972)에서 돌체와 세시봉, 동화음악실 같은 명동의 음악실로 커피를 마시러 다녔던 전후파 여대생들을 등장시킨다. 소설가 이세기씨는 복개 직후 청계천에 들어선 음악카페 ‘템테이션’에 소설가 황순원 선생과 <현대문학> 편집장 김수명씨와 함께 다니던 시절을 아스라이 회고한다. 복개되기 전 3층짜리 판잣집들이 들어서 있던 시절의 남루한 청계천 풍경은 소설가 구인환씨의 <판잣집 그늘>에 잘 그려져 있다. “청계천! 맑은 물이 흐르고 가로수가 늘어서고 가로등이 조는 연도를 젊은 쌍쌍이 아베크 하는 동경의 냇가이어야 할 게 아닌가. 체!” 주인공인 상이군인은 이렇게 개탄하는데, 그가 체념하듯 읊조린 청계천변의 꿈 같은 풍경은 지금 어느 정도 실현된 것일까. 이가림씨의 시 <우리들의 둥지>는 “명륜동 앞길로 전차가 지나다니고/구멍 뚫린 카키빛 작업복 주머니 속에/등사판 잉크 냄새 풍기는 교재를/세기아(世紀兒)처럼 꽂고 다니던 시절”을 노래한다. 고향 전주를 떠나 서울로 진학한 시인은 친구들과 막걸리를 한 동이씩 마시고는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고래고래 부르며 남산 꼭대기까지 올라가고는 했다고. ‘천변풍경’ 현장답사편 ’서울 랩소디’ 시인 김후란씨는 청계천 수표교에 얽힌 흥미로운 사연을 들려준다. 인사동에 살면서 교동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인은 “다리 난간에 촛대 모양의 돌기둥이 줄지어 있”던 예쁜 돌다리 수표교를 지나가곤 했다. 그러던 그가 노년에는 장충단 근처에 살면서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진 수표교를 손주들과 함께 거니는 것으로 인연을 이어간다.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자신들의 삶과 문학에 버무려 더듬은 문인들의 심정은 아마도 소설가 윤후명씨의 단편 <서울 랩소디>에 적절히 요약되어 있을 법하다. 박태원 소설 <천변풍경>의 현장을 답사하는 소설가가 주인공이다. “아름답고 깊이 있는 공간에 내 삶을 놓고 싶다. 우리들 모든 일회성 삶에 영원성을 담보하는 도시 공간을 꿈꾼다. 순간, ‘천변’의 백 년, 2백 년 된 고전적 카페에 앉아 한 줄의 명문을 쓰고 있는 나를 꿈꾼다. 그렇다면 제목은 또 다른 <천변풍경>이 되어도 좋으리라 가늠하면서…” ‘문학의 집·서울’은 27일 오후 2시부터 ‘2006 서울문학인대회’를 열어 ‘우리의 서울, 문학적 생태와 역사’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하고 ‘문학과 평화와 자연을 위한 2006 서울문학인대회 선언문’을 채택한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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