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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걷는 사람’ 보면 계급이 보인다

등록 2006-10-26 21:26수정 2006-10-26 21:35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br>
조지프 A. 아마토 지음. 김승욱 옮김. 작가정신 펴냄. 2만5000원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
조지프 A. 아마토 지음. 김승욱 옮김. 작가정신 펴냄. 2만5000원
먹기 위해 ‘걸었던’ 고대·‘걷는’ 부랑자 체포했던 중세
‘걷기는 예술’ 낭만적 보행자 나타난 18~19세기 지나
자동차 등장 뒤 ‘걷기’는 쇼핑·저항의 상징으로
시대에 따른 ‘걷기’의 문화인류학적 변천사
꽃다운 나이 28살이었던 지난해 허리디스크를 앓았다. 질병 이름조차 생소해 ‘허리디스코’인 줄 알았고, ‘디스코’를 심하게 추면 걸리는 병인 줄 알았다. 걸을 수 없었다. 누워 있으면 통증이 완화돼 그때 난 주로 누워 있거나 배꼽과 엉덩이에 힘을 잔뜩 주고 엉금엉금 걸어다녔다. 지난해 7월22일에 쓴 일기장엔 이렇게 써있다.

‘내 상태가 이렇다 보니 길거리서 누군가를 향해 뛰어가는 사람들, 무거운 물건을 들고도 별로 힘들어하지 않는 사람들, 높은 굽의 신발을 신고 시원해 보이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들, 기사 마감 때문에 각종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폭발하기 직전이지만 후배에게 약 사다주고 음식 만들어주고 기사 쓰러 발걸음을 돌리는 선배들…. 이런 사람들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그런 행위가 누군가에게 참 행복해 보인다는 걸 알기나 할까?’

그 때 난 깨달았다. 걷기의 행복함을, 걷는 행위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음을. 그런데 나보다 더 ‘걷기’에 관심을 쏟고 ‘걷기’에 관한 방대한 문화인류학적 지식을 풀어놓은 책이 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심이 어떨지?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일상적이여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걷기’. 그러나 걷기를 통해 ‘나’를 이해할 수 있고 ‘사회’를 이해할 수 있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지은이는 역설한다. 특히 각 시대마다 ‘걷는 사람들’만 봐도 그 사회의 계급 분화 양상을 알 수 있다는 시각은 신선하다.

책은 고대·중세·근대·현대 등 시대순에 따라 서술해 읽기 편하다. 시간이 없는 분들은 관심있는 페이지만 골라 읽어도 역사서 읽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듯하다.

태초엔 발이 있었다. 인류는 물과 먹잇감를 찾아 동물과 함께 이동했다. 동물을 가축화하면서 걷기의 역사는 획기적으로 바뀐다. 정착하게 되고, 농업을 통해 잉여 식량이 생산되면서 집단과 계급이 생겨난다. 말을 소유한 사람들은 특권층이고, 울퉁불퉁한 거리, 위험한 거리를 걷는 사람은 하류층이었다. 힘센 말을 동원해 먼 땅을 정복하려는 사람들이 생겼고, 도로 건설능력이 뛰어난 로마인들은 지중해 일대를 통합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 거다.

귀족들은 과시하려 ‘걷기’ 차별화


도시는 새로운 보행자들을 키워냈다. 바뻐 서두르는 통근자, 한가로이 걸어다니며 상점을 구경하는 사람들, 조직적으로 행진하는 집단 등이 특히 눈에 띄는 존재였다. 19세기 언던은 도시의 보행환경 변화와 현대의 도시 보행자들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잘 보여준다. 사진은 ‘19세기 런던의 터미널 풍경’. 작가정신 제공
도시는 새로운 보행자들을 키워냈다. 바뻐 서두르는 통근자, 한가로이 걸어다니며 상점을 구경하는 사람들, 조직적으로 행진하는 집단 등이 특히 눈에 띄는 존재였다. 19세기 언던은 도시의 보행환경 변화와 현대의 도시 보행자들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잘 보여준다. 사진은 ‘19세기 런던의 터미널 풍경’. 작가정신 제공
중세시대에는 말을 탄 전사들이 귀족이 됐다. 이때 주로 ‘걷는 사람’들은 거지, 기마전사, 방랑 수도사, 농민이었다. 빈민들, 실업자, 병들고 부상당한 사람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그러나 흥미로운 건 ‘걷고 싶을 때만 걸었던’ 왕들도 때로는 걸을 수 없는 처지로 몰렸다. 도로상태가 좋지 않아 가마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려 멀미증세를 느꼈기 때문이다. 궁정과 각 지방 관료들은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걷기 위해 늘어나는 부랑자들을 체포하고 처벌하려 했다 한다. 현재 우리는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만, 그 시기엔 지금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랑자들에 대한 법률’을 공포해 걷기를 제한하려고 했다니 ‘걷는 행위’조차도 사회적이라는 걸 책은 자연스럽게 알려준다. 1100년부터 1400년까지 상업이 번성했다. 베니스, 밀라노, 런던, 파리 등 상업의 중심지들이 대도시를 형성하며 보행의 중심이 됐다. 상인들은 부를 축적하면서 차차 걷는 사람들의 부류에서 벗어난다.

중세 직후부터 ‘걷기’는 또다른 차원으로 발전한다. 새로 부상한 중산층과 귀족계급들이 새로운 형태의 걷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를 과시하고 남들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훌륭하게 걷는 법, 형식을 갖춘 춤 등을 통해서다. 이들의 우아함을 위해 스타일과 패션이 발전하면서 향수·화장품·화려한 옷·우산 등 소품들이 발달했다. 고대·중세까지 하류층이 어쩔 수 없이 걸었다면, 중세 직후부터 근대에 접어들면 ‘걷기’는 중산층의 여가활동 핵심이 된다. 18, 19세기에 접어들어 낭만적 보행자들이 나타나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 프랑스 작가·사상가 장 자크 루소, 독일 철학자·시인 괴테, 미 낭만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 등 내로라는 예술가·학문가들이 걷기를 예찬하고 나섰다. 그들은 걸음으로서 자아를 발견하고, 탈 것을 애용하는 사회의 관습에 도전했다. 특히 소로는 그의 책 <걷기>에서 걷기를 소수의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 주장하며 걷기를 예술의 경지로까지 올려놓는다.

루소·괴테·소로의 ‘걷기’ 예찬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다시 ‘걷기의 지위’는 하락한다. 사람들의 걷는 시간은 대폭 줄어들었다. 테니스, 수영, 등산, 자전거 타기, 스키 등에 자신의 자리를 뺏긴다. 이젠 사람들은 쇼핑할 때 걷고, 관광할 때 걷고, 비폭력 저항의 상징으로서 걷는다. 나아가 각종 ‘걷기 대회’의 행태로 소비하고 있다.

생존의 수단에서 소비의 대상으로까지 변한 ‘걷기’의 변천사. 이 책은 인류학적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에겐 흥미진진하게 다가올 것이다. 책을 읽고 중세 방랑 수도자의 느낌으로 걸어볼 수도 있고, 워즈워스처럼 시를 읊으며 걸을 수도 있겠다. 인류의 직립보행에서 시작해 국가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파시즘의 전투적 걷기 공동체까지 나아가는 상상력이 이채롭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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