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혜 시집 ‘고요에 기대어’
시인 김초혜(63)씨는 소설가 조정래(63)씨의 부인으로, 두 사람은 대표적인 문단 커플로 꼽힌다. 남편 조씨가 대하소설 3부작을 완성하는 20년 동안 부인 김씨는 그의 반려이자 문학 동료로서 든든한 후원군 노릇을 했다. 그러나 김씨가 단지 ‘유명 소설가의 아내’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 자신 <사랑굿>(1986)이라는 시집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베스트셀러 시인이기도 했던 것.
김초혜씨가 8년 만의 신작시집 <고요에 기대어>(문학동네)를 펴냈다. 장년을 지나 노년으로 생의 한 굽이를 넘어 가는 무렵의 마음의 풍경을 단아한 어조로 노래한 시들이 묶였다.
“떨어져 누운 꽃은/나무의 꽃을 보고/나무의 꽃은/떨어져 누운 꽃을 본다/그대는 내가 되어라/나는 그대가 되리”
맨 앞에 실린 <동백꽃 그리움>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개화와 낙화, 삶과 죽음으로 가차 없이 갈렸으되 그 난해한 경계와 거리를 뛰어넘어 상대를 향하는 마음의 작용이 동백꽃을 매개로 포착되었다. 다른 시들에서도 이별이 초래한 거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적극적이다. 그것을 그리움이라 할 것이다.
“부서지는 것이/어디/너뿐이랴//부서져/파도가 못 되어/울고 섰노라”(<밤바다> 전문)
“구름이 낮아지더니/눈이 내린다//과거는 현재로 오고/현재는/과거로 돌아선다//(…)//눈이 내리면/갈 길이/다른 사람과도/함께 걷고 싶다”(<첫눈> 부분)
파도가 되어 부서지는 ‘너’의 곁에는 함께 부서져 파도가 되고 싶은 (나)가 있다. 이 시에서 “울고 섰”는 주체인 ‘나’의 의도적 생략은 안타까운 슬픔의 강도를 한껏 드높인다. 내리는 눈이 과거와 현재를 서로에게 등 떠민다는 발상은 어떤가. 눈은, 특히 첫눈은 갈 길이 다른 사람과도 함께 걷고 싶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그리움이 빚어내는 역설적 화해의 몸짓은 노년과 죽음을 노래한 시편들에서 한결 호소력을 더한다. 시인의 연치 어느덧 갑년을 지났으니 “마음의 덮개가/열리고 닫히는(…)/귀신도 못 봤”(<변명>)다는 경지를 엿보게 된 덕분이리라.
“삶의 보람이 죽음이 아니라고/빛을 그려보지만/매일 죽는 봄밤/꽃이 피니/더욱 늙는다/그리운 이여”(<봄은 오는데> 전문)
“한 번에 무너지는/자운영 꽃밭보다는/매일 무너지는/자운영 꽃밭을”(<인생> 전문)
한 번에 무너지는 것과 매일 무너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무너짐은 곧 죽음일 텐데, ‘매일 죽음’이란 대체 무엇일까. 삶 속에 죽음이 있다는, 탄생이란 곧 죽음의 시작이라는 깨달음을 가리키는 것 아닐까. 그런 깨달음은 삶과 죽음에 관한 종교적·철학적 사유의 결과 논리적으로 도출되기도 하지만,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으면서 경험적으로 체득되기도 한다.
“먼 길 가시도록/꽃비가 내리고/붉은 꽃비가 내리고//발걸음이 더뎌/아직도 가고 있는지//이승의 허망이 무거워/힘이 부치면/뜨거운 이 눈물/딛고 가시라”(<눈물 - 오라버니에게> 전문)
“비낀 햇볕에/새 한 마리 울면서/어디로 가는가//세상길에서/그대가 벗어난 후/쓸쓸한 가을 속으로/우리도 새가 되어/자주 날아갑니다”(<새 - 정운영에게> 전문)
김초혜씨의 시들은 단형 서정시의 정수를 보여준다. 허랑한 요설과 광포한 이미지로 치닫는 이즈음의 시들과는 달리 언어의 경제성에 입각해 있다. 마지막으로, 노년의 고적하지만 평화로운 나날을 노래한 시를 읽어 보자.
“은은한 차향기/쓸쓸하나 아름다운 일몰/담 밑에/무심히 핀 과꽃/우연찮게 듣게 되는/가을 노래/간간이 내리는 비/마음으로 주고받은 꿈/그러나/고요 속에 지고 있는 삶/기억 한 자락/하루를 보낸다”(<일상> 전문)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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