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탄생. 장석주 지음, 작가정신 펴냄. 1만8000원
백석의 ‘정주’ 미당의 ‘질마재’ 황지우의 ‘광주’…
김소월에서 황병승까지 한국 현대시에 그려진 문학지리학
인간을 심원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게 ‘장소의 본질’
김소월에서 황병승까지 한국 현대시에 그려진 문학지리학
인간을 심원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게 ‘장소의 본질’
‘문학지리학’이라는 것이 있다. “특정 지역에서 꽃핀 문학적 자산을 자연지리에 대한 관심과 연결해 그 지리의 위치, 지형, 인심, 풍속, 인물, 기후, 생태, 역사, 지역의 방언분화, 공동체의 체험 등을 전체로 아우르며 그것이 문학 상상력에 어떤 자양분을 공급하고, 미학적 숨결을 불어넣었는가를 따지고 캐는 것이다.”
전방위 작가 장석주씨의 비평집 <장소의 탄생>에 서술되어 있는 설명이다(28~29쪽). ‘우리시의 문학지리학’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김소월에서 황병승까지 한국 현대시에 그려진 특정 공간, 곧 장소의 특징과 의미를 인문지리적 프리즘으로 살펴본다. 이중환의 <택리지>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그리고 에드워드 렐프의 <장소와 장소상실>(논형, 2005)이 지은이의 탐구 여정을 이끌었다.
“시인들이 시 속에 새긴 ‘장소들’에 대한 뜻을 짚어보며, 땅과 사람이 어떻게 상호소통하며 심원한 존재로 나아가는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장소상실로 인해 맞는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해보려는 작은 시도다.”(28쪽)
“장소들은 획일화되거나 유사화되면서 우리는 점점 더 장소를 잃고 무장소들로 떠밀리는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36쪽)
문학작품과 그 공간적 배경 사이의 관계에 대한 탐색은 흔히 문학기행이라는 방식으로 시도된다. 문학지리학은 문학기행과 상당부분 포개지면서도 만만치 않은 차이를 남겨둔다. 문학기행과 달리 문학지리학은 반드시 작품의 현장을 발로 밟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당 공간에 대한 문헌과 지도 등 자료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많다. 장석주씨의 책에서 실제로 답사해 보지 못한 북녘 땅 정주와 그곳을 무대로 삼은 소월과 백석의 시에 관한 언급이 풍성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님을 둔 곳이길래 곳이 그리워/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남북으로 오며가며 아니 합디까”(김소월 <삭주 구성> 네 번째 연)
소월의 시 <삭주 구성>은 ‘몸’과 ‘님’과 ‘곳’(=장소)이 하나가 되어 그리움을 촉발시키는 고향상실자의 안쓰러운 처지를 노래한다.
장소 점점 획일화 ‘무장소의 운명’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앞부분)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쓸쓸한 저녁을 맞는다//흰 밥과 가재미와 나는/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흰밥과 가재미와 나는/우리들이 같이 있으면/세상 같은 건 밖에나도 좋을 것 같다”(백석 <선우사함주시초 4> 앞 두 연과 마지막 연)
소월과 동향인 백석의 시들에서 고향상실자의 회한과 고향을 상대로 한 장소애(=특정 장소에 대한 사랑)는 한층 절절한 표현을 얻는다. “백석의 시세계에서 두드러진 변방의 토속어 지향과 유년기의 기억들은 장소애라는 하나의 초점으로 모인다.”(84쪽) 그런가 하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같은 작품에서는 “고향상실자의 억누를 길 없는 회한과 쓸쓸함의 정조”(76쪽)가 만져지는데, 고향에 대한 사랑과 그를 향한 그리움은 사실은 하나의 뿌리에서 벋어난 두 개의 가지라 할 수 있다.
백석 시세계 ‘장소애’ 강해
백석의 정주와 비슷한 것이 미당 서정주의 질마재다. 산문시집 <질마재 신화>에 그려진바 미당의 고향 질마재는 신화와 현실, 인간과 환경이 분별을 여의고 하나가 되는 영원한 순환의 장소로 나타난다. “서정주 시세계의 심미적 자기완성이 ‘질마재’의 기억과 만나면서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타인과 세계와의 교섭을 통해 두루 인격이 길러지며 인간 존재를 심원한 의미를 지닌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바탕이 바로 장소의 본질이라는 것을 증명한다.”(118쪽)
신경림의 시 <눈길>과 <목계장터>는 나란히 한반도 중부 내륙에서 빚어져 나온 절창이지만, 그 느낌과 효과는 사뭇 다르다. “아편을 사러 밤길을 걷는다/진눈깨비 치는 백 리 산길/낮이면 주막 뒷방에 숨어 잠을 자다/지치면 아낙을 불러 육백을 친다”로 시작하는 <눈길>에서 주인공이 머무는 ‘주막 뒷방’은 “생업을 잃은 자가 임시로 머무는 무위도식의 공간”으로 “시적 화자가 직면하고 있는 상징적·표상적 실존을 함축적으로 말해준다.”(133쪽)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로 시작하는 <목계장터>의 주인공 역시 정처 없이 떠도는 처지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어조는 한결 밝고 경쾌하다. 왜냐하면 이 시에서 “‘목계’라는 나루터는 산업사회의 여러 변화 양상에 적응하지 못한 화자가 하늘과 땅, 산과 강의 세계, 즉 시의 화자가 높은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는 농경사회적 삶의 방식에로 떠나려는 출발 장소”(135쪽)이기 때문이다.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거기까지 닿은 길이/몇 갈래의 길과/가까스로 만나는 것을./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벋는구나.”(고은 <문의마을에 가서> 앞부분)
고은, 장소 정체성에 대한 거부
신경림의 시들과 마찬가지로 중부 내륙을 배경 삼은 고은의 <문의마을에 가서>는 장소에 대한 귀속감이 흐릿하다. 길은 문의마을에 이르러서는 몇 갈래의 다른 길들과 만나 저마다의 방향으로 흩어진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시집 <문의마을에 가서>에 나오는 수많은 장소들 역시 “장소 정체성에 대한 거부를 드러낸다. 더 근원적으로는 이 세상이 스쳐 지나는 곳일 뿐 참된 장소가 아니라는 부정의식”(139쪽)을 보여준다는 것이 장석주씨의 판단이다.
같은 광주를 노래하였으되, “몰정치적이고 역사순응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미당의 <무등을 보며>와 “시대적 약호로서의 이념과 정치적인 색채로 착색되어 있”(이상 232쪽)는 황지우의 <호남의수족관> 사이의 이념적 거리, 오장환에서 김수영을 거쳐 김혜순과 이문재로 이어지는 서울 시편들의 변모 양상, 박목월의 경주와 유치환의 통영이 시로 몸을 바꾸는 과정에 관한 설명들도 흥미롭다.
글·사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작가정신 제공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경남 통영항 전경. 이곳 출신 시인 유치환과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 이곳으로 내려왔던 북관 사내 백석은 서로 다른 느낌으로 통영을 노래했다. 문학지리학적 방법론을 동원한 장석주씨의 비평집 <장소의 탄생>에서 그에 관한 설명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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