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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더 아름다운 종을 기다리며

등록 2006-12-21 17:16

 <캐비닛> 김언수 지음, 문학동네 펴냄. 9800원
<캐비닛> 김언수 지음, 문학동네 펴냄. 9800원
휘발유를 먹는 사람·손가락에서 나무가 자라는 사람…
이들의 출현은 현인류가 새로운 종으로 대체될 때라는 증거
기이한 습벽을 지난 사람들의 파일을 관리하는 ‘나’의 입 빌려
환상적이고 허구적인 방식으로 인류 미래 고민하는 소설
김언수(34)씨의 장편 <캐비닛>은 올해부터 5천만원으로 상금이 오른 문학동네소설상의 제12회 수상작이다.

“지난 칠 년간 13호 캐비닛의 한 부분을 담당해온 관리자”(26쪽) ‘나’가 소설을 끌어 가는 화자로 등장한다. 그가 관리하는 캐비닛에 담긴 자료 파일은 한마디로 독특하고 기이한 습벽을 지닌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휘발유와 유리, 강철, 신문지 따위를 먹는 사람들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갈수록 점입가경.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사람, 혀 안에 작은 도마뱀이 깃들어 살다가 아예 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사람, 기억을 삭제하거나 변형시키는 사람, 몇 시간에서 며칠, 또는 몇 달씩 시간을 건너뛰는 사람, 스스로를 외계인의 후손이라 믿는 사람, 고양이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

소설 속에서 이들은 ‘심토머’(symptomer)로 불린다. ‘징후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어떤 징후? 그들에 관한 기록, 그러니까 캐비닛 속 파일들을 작성해 온 권박사에 따르면 그들은 현재의 인류가 그 수명을 다했으며, 이제 새로운 종으로 대체될 때가 다가왔다는 사실의 강력한 증거다. 그들은 기존 인류의 소멸과 새로운 종의 출현 사이를 잇는 중간적 존재들이라는 것.

소설 화자인 ‘나’란 이런 권박사의 조수로서 캐비닛과 그 속 자료들의 관리를 떠맡은 처지. 그는 심토머들에 관한 기록을 읽고 때로는 그들을 직접 만나서 상담도 한다. ‘나’에 따르면 소설 <캐비닛>은 “지난 역사 동안 재앙과 질병과 광기로 치부되어왔던 새로운 종에 관한 이야기” “과학의 현미경에서 벗어나면 뭐든지 마법과 이단이 되어버리는 이토록 이상한 과학의 세상에서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이 골방에 처박혀 답답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심토머’들의 이야기다.”(33쪽)

현대인은 모두 ‘타임스키퍼’

심토머들의 존재와 증상에 대해 작가는 책과 신문기사, 경찰서 사건기록 등의 전거로 충실하게 뒷받침한다. 그러나 허구의 장르인 소설의 틀 안에 들어온 이상 제 아무리 객관적 사실의 탈을 쓰고 있더라도 거짓말일 개연성에 대해서 독자는 항상 자신을 열어두어야 하는 법. 작가는 화자 ‘나’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겠는가.

“나는 상상력의 힘을 믿는다. 나는 13호 캐비닛의 관리자니까. 거기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153쪽)

일어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엉뚱하고 황당무계한 공상의 세계가 현실을 사는 우리와는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시간을 건너뛰는 ‘타임스키퍼’(time skipper)에 관한 설명을 들어보자. 이들이 건너뛴 시간이란 사실은 잃어버린 시간이다. 몇 시간 혹은 며칠, 몇 달씩의 시간이 아무런 흔적도 기억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증상. 이 증상에 걸리는 이들이 “모두 시간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사람들”(177쪽)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시간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이들에게 왜 시간이 사라져버리는 증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나’의 입을 빌린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삶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든다. 습관과 규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삶이라니 그런 삶이 세상에 있을까. 혹시 효율적인 삶이라는 건 늘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기억할 만한 멋진 날이 몇 개 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182쪽)

그러니까, 효율과 생산성이 지배하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타임스키퍼다! 그 자신 여섯 번의 타임스킵 현상을 경험한 한 등장인물의 말을 들어보자: “사라진 시간 속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낭비도, 폐허도, 후회도, 상처도,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았다는 느낌도 없죠.”(183쪽)

영화 ‘지구를 지켜라’ 떠올려

작가는 여기서 효율과 생산성에 지배당하는 우리의 일상이야말로 건너뛴 시간,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냐고 묻는 것이다. 자신이 둘로 분리되고, 어느 한쪽이 지겹고 반복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동안 다른 한쪽은 유년기의 고향을 찾아갔다가는 죽음을 맞곤 하는 경험을 반복하는 인물은 같은 취지의 말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름답고 행복한 나는 모두 죽어버리고 이 밀리미터 나사를 돌리는 나만 지겹고도 지겹게 오래 사는구나.”(262쪽)

<캐비넷>의 저자 김언수씨
<캐비넷>의 저자 김언수씨
소설은 다양한 양태를 보이는 심토머들의 증상을 차례로 소개하고 그것이 지니는 현실적 맥락을 설명하는 병렬적 구성을 지닌다. 외양은 풍성하고 화려해 보여도 자칫 단조로운 변주와 반복에 떨어질 수도 있는 형식이다. 그 점을 보완하면서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해 작가는 심토머들의 유전공학적 잠재력을 탐내는 산업 스파이와 고문 기술자를 등장시킨다. 동일한 심토머를 접하면서 그것이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모종의 징후를 보여준다고 믿는 권박사 식의 태도와 그 산업적 측면만을 보는 경제적 접근법이 대립하는 셈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산업 스파이가 등장하는 말미의 이야기는 소설의 나머지 부분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캐비닛>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박민규 소설 <핑퐁>과 조하형 소설 <키메라의 아침>, 그리고 장준환 감독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 등이 떠올랐다. 이 소설과 영화 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환상적이고 허구적인 방식으로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을 수행한다는 점일 것이다. <캐비닛>의 권박사는 <핑퐁>의 못과 모아이가 아닐까. 현재의 인류가 과연 존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병상에 누운 권박사의 유언과도 같은 말을 들어보자.

“나는 더 아름다운 종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더 이타적이고 더 따뜻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항상 이웃의 삶과 같이 생각하는 박애적인 종이 이 지구 위에 번성했으면 좋겠어.”(255쪽)

권박사의 말은 화자 ‘나’의 깨달음과도 통한다. 그는 우리가 범인과 희생자, 강자와 약자, 행복과 불행 등과 더불어 같은 지하철을 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공존의 윤리, 그것이 소설 <캐비닛>의 결론이다.

“어쨌든 우리는 같은 지하철을 타고 있다!” (204쪽)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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