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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전투 한복판에서 적장과 사랑에 빠지다

등록 2007-02-01 19:08수정 2007-02-01 20:00

<알렉산더의 연인>샨사 지음. 이상해 옮김. 현대문학 펴냄. 1만원
<알렉산더의 연인>샨사 지음. 이상해 옮김. 현대문학 펴냄. 1만원
남성 동료들과 성애를 나눈 서방 남성 알렉산더
여성 동료에게 사랑을 느낀 동방 여성 알레스트리아
치열하게 싸우다 무기 던지고 ‘이성애’ 받아들여
중국계 프랑스 작가 샨사의 여섯번째 소설
지난 여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계 프랑스 작가 샨사(35)는 자신을 ‘불꽃 위를 나는 새’에 견주었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결합된, 자기 안의 이원성을 소설 속에서 표현하고 싶다고도 했다. 새롭게 번역돼 나온 그의 여섯 번째 소설 <알렉산더의 연인>은 샨사의 그러한 자기인식과 소설관을 잘 보여준다.

‘적과의 사랑’. <알렉산더의 연인>을 샨사의 출세작인 <천안문>과 <바둑 두는 여자>, 그리고 바로 앞선 작품인 <음모자들>과 이어 주는 핵심 모티프다. <천안문>에서는 천안문 시위의 주동자인 여대생 아야메이와 그를 뒤쫓는 정부군 장교, <바둑 두는 여자>에서는 일제 식민 군대의 장교와 피식민지인 중국인 소녀, 그리고 <음모자들>에서는 중국 정부 첩자인 아야메이와 미국 중앙정보부 요원인 조나단이 적을 사랑하는 남녀로 등장한다. <알렉산더의 연인>의 원제는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 알레스트리아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정복왕 알렉산더가 동방 원정 중에 마주쳐 전투를 벌이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한 아마존 부족의 여왕이다. 사료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동방 원정 중에 ‘록산’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아마존’이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소아시아의 무사 부족을 이른다. 작가는 사료상의 인물 록산과 신화 속의 아마존을 결합해서 알레스트리아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소설은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 그리고 알레스트리아의 친구이자 시녀인 아냐 세 사람의 시점을 오가며 진행된다. 소설 첫장에서 알렉산드리아는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지나,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무기 삼아 점차 권력을 확보해 가고, 마침내는 아버지 필립포스를 살해하고 최고 권좌에 올라 주변 국가들을 침탈하면서 영토를 넓혀 간다.

남성성-여성성, 동방-서방의 결합

이어지는 제2장과 4장의 초점 화자 ‘나’가 알레스트리아가 아닌 아냐라는 사실이 이채롭다. 알레스트리아가 화자 ‘나’로 등장하는 것은 소설이 절반 가까이 나아간 제6장에서부터이며, 그 뒤로는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 아냐 세 사람의 시점을 오가며 소설이 진행된다.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제목과 달리, 아냐가 포함된 세 사람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것, 또는 알레스트리아를 놓고 알렉산더와 아냐가 다투는 일종의 삼각관계가 소설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알렉산더가 어린 시절 남성성의 화신과도 같은 아버지를 혐오하고 두려워했으며 어머니의 여성성에 더 끌렸다면, 알렉산더를 만나기 전의 알레스트리아는 남성을 혐오하고 금지하며 스스로 남성이 되고자 하는 부족의 일원이었다. 알렉산더가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한 데 이어 남성 동료들과 성애를 나누며, 알레스트리아가 같은 여성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두 사람이 치열한 전투의 한복판에서 마주쳤을 때, 알렉산더는 알레스트리아를 남성(‘그’)으로 생각했고 반대로 알레스트리아는 알렉산더를 여성(‘그녀’)으로 인식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을 서로 자신의 성이라 생각하고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다음은 알렉산더의 시점으로 서술된 사랑의 첫 장면이다.

“우리는 무기를 던지고 땅으로 미끄러졌다. 우리는 입술과 입술, 가슴과 가슴을 겹친 채 풀숲을 뒹굴었다. 우리의 다리가 휘감겼다. 그런데 알레스트리아는 여자였다!”(127쪽)

최초의 혼란과 충격에서 벗어나자 두 사람은 이성애를 자신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특히 남성과의 사랑을 금지하는 아마존 부족의 여왕인 알레스트리아에게 알렉산더와의 사랑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가 본래 이름 탈레스트리아에서 ‘ㅌ’ 음가를 뺀 알레스트리아로 이름을 바꾼 것은 부족의 전통에 따른 것이었으나, 그것은 또한 그가 자신의 부족에서 스스로를 추방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한 아냐(본래 이름 ‘타냐’)의 경우도 마찬가지.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의 결합은 단지 성 정체성의 착종, 또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결합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금발의 알렉산더가 상징하는 서방과 검은눈의 알레스트리아가 상징하는 동방의 결합으로 그 의미는 뻗어 나간다. 다음은 알렉산더가 각각 친구 헤파에스티온과 마케도니아 병사들을 상대로 자신의 정복 전쟁의 의미를 설파하는 대목이다.

“나는 서방과 동방이 하나가 되길, 페르시아인들의 호화로움이 우리들의 철학과 어우러지길, 마케도니아의 힘이 동방 예술의 아름다움 속에서 활짝 피어나길 바라. 나는 우리들의 피가 서로 섞이기를 원해.”(74쪽)

“마케도니아의 병사들이여, 너희의 발걸음에 따라 문화들이 뒤섞이고, 언어들이 결합되고,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들은 유대인의 총명함, 페르시아인의 섬세함, 마케도니아인의 활력을 타고난다.”(188쪽)

알렉산더의 동방 정벌 이후 간다라 문화로 대표되는 동서 문명의 습합과 혼융이 활발해졌다는 사실을 이쯤에서 상기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 샨사. <한겨레> 자료사진
작가 샨사. <한겨레> 자료사진
“알렉산더가 날 택했기에 작품 써”

알레스트리아가 알렉산더의 아이를 수태했다가 사산하는 사태에 이어 인도 정벌에 나선 알렉산더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는 사건을 겪으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하게 방향을 바꾼다. 알렉산더가 알레스트리아의 세계로 ‘귀의’하는 것이다. 아냐까지 포함된 세 사람은 제국을 떠나 초원의 아마존 부족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친다.

“알렉산더가 나를 택했기에 이 작품을 썼다”고 샨사는 말했다는데, 장대한 스케일과 섬세한 심리 묘사, 그리고 특유의 시적인 문체가 어우러진 소설을 보면 그의 당돌한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다음은 추천하고 싶은 몇 문장들.

“사랑은 따뜻한 정이다. 사랑은 차가운 공포다. 사랑은 폭신한 베개이자 목 위에 놓인 칼이다.”(217쪽)

“전쟁은 남자들의 광기야! 그리고 나, 알렉산더는 그 광기의 화염이야.(…)전장은 참혹함을 목말라 하는 남자들이 미쳐 날뛰는 약속장소야…”(231쪽)

“각자에겐 자기만의 전쟁이 있다. 각자에겐 자기만의 광기가 있다. 알렉산더가 알려진 세상의 경계 너머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알레스트리아는 금기를 깨고 미지의 운명을 향해 나아갔다.”(237쪽)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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