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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내 몸에 흐르는 ‘나쁜 피’의 기원

등록 2007-03-15 19:23

 <전갈> 김원일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9800원
<전갈> 김원일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9800원
교도소 들락날락 조폭, 엉뚱하게도 할아버지 생애 추적
그 양반은 독립군 활동하다 마루타 잡혀가 일본군 ‘충성개’ 노릇
가난과 폭력과 우울증의 삶, 대물림된 유전인자로 돌려
“현대사 중심부에서 열외자가 된 ‘그림자 같은 존재’의 기록”
김원일(65)씨의 새 장편소설 <전갈>이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다.

<전갈>의 주인공은 30대 중반의 조직폭력배 강재필. 절도와 폭력, 마약 등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10여 년 세월을 흘려보낸 그는 감옥에서 나오자 엉뚱하게도 할아버지 강치무의 개인사를 추적, 정리하는 일에 매달린다. 1900년에 태어나 1958년에 작고한 할아버지 강치무는 일제시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는 일본 관동군 사령부 초병 보조원으로 변신하고, 해방 이후에는 고향 밀양으로 돌아와 좌파의 시위와 소요에 가담했다가 빨치산으로 입산하는가 하면, 전쟁 중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중공군 포로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전쟁 이후로는 하릴없이 낚시질로 여생을 마무리한, 매우 어지러운 이력의 소유자다.

그 강치무가 일본군 초병으로 근무할 때 일본군에 체포된 오라비의 소식을 알고자 찾아온 김덕순과 눈이 맞아 낳은 게 강재필의 아비인 강천동. 1936년에 만주 하얼빈에서 태어난 천동은 해방 뒤 부모를 따라 귀국했으나, 공부에는 뜻이 없어 중학교를 마친 다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노동자가 된다. 그러나 프레스 공장에서 오른손을 잃고 해고된 이후로는 폭력과 갈취로 인생을 탕진하다가 1994년 세상을 뜬다. 그가 아들 강재필의 어미와 결혼하게 된 것도 공장 노동자였던 재필 어미를 강제로 범한 결과였다. 그러니 가난과 폭력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감옥 신세를 지고 우울증에까지 걸리게 된 주인공 강재필의 생은 아버지에게 영향 받은 바 큰 셈이다. 그런 강재필이 새삼 할아버지의 생애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먹게 된 것은 그를 통해 자신을 좀 더 잘 알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나는 생전에 할아버지를 본 적 없었다. 산적 두목 같은 용모의 당신은 내게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할아버지란 실체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아마 마약중독에서 헤매던 때부터였을 것이다. 더 윗대까지는 따지지 않더라도 할아버지 그분을 알게 되면 나라는 실체도 알 것 같았다.”(18~19쪽)

‘나’를 알기 위해 할아버지를 알아야겠다는 강재필이 ‘유전인자’에 특히 집착하는 것이 흥미롭다. “그 아비에 그 자식 아니랄까 봐 어쩌면 이렇게도 내가 아비 전철을 밟느냐란 자격지심이 들었다.”(14쪽) “처음은 내 정신병이 집안 유전인자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파보려 했는데, 그 양반이 자꾸만 나를 당겨. 네 자신을 위해서 나를 기록해보라고.”(21쪽)

아비도 폭력과 갈취로 인생 탕진

두 번째 인용의 ‘그 양반’이란 바로 할아버지 강치무(의 혼령)를 이르거니와, 아버지 강천동으로부터의 ‘나쁜 피’의 유입 가능성에 대한 불길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탐색이 할아버지라는 복합적인 인물에 대한 연구로 옮겨 간 형국이다. 소설은 주인공 강재필을 1인칭 ‘나’로 표현하는 장과 아버지 강천동의 삶을 3인칭으로 서술하는 장이 엇갈리면서 진행되다가 제6장과 8장에서는 강재필이 기록한 할아버지 강치무의 삶이 역시 3인칭으로 서술된다.

재필이 기록한 할아버지의 삶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독립군에서 일본군 초병 보조원으로 변신한 만주 시절이다. 재필이 할머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채집해 재구성한 바에 따르면, 강치무는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고 악명 높은 마루타 부대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과 생체실험에 시달린다. 그러던 중 고통 속에서 안식을 염원하는 동지를 대신 죽여 주고, 그에 대한 공포와 죄책감에 이빨로 제 혀를 잘라내 혀짤뱅이가 된 뒤로는 “시키는 일에만 허리 굽실거리며 충성을 바치는 개가 되”어 “비루하게, 겨우 살아남았다.”(276쪽)


강재필의 탐구가 궁극적으로 이른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할아버지 강치무는 평생 그 멍에를 지고 살았다. 그 유전자를 아비가 물려받았고, 필자(=강재필)의 피는 물론 머리카락, 손톱, 발톱에도 할아버지 유전인자가 존재할 터이다.”(297쪽)

김원일씨
김원일씨
다시 유전인자다. 강재필은 ‘운명’이라는 단어 역시 즐겨 입에 올리는데, 매사에 유전인자와 운명의 힘을 과도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아무래도 소극적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가 할아버지의 생애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매달리는 동안 그를 감옥으로 보냈던 폭력 조직에서는 또 다시 거액의 돈을 미끼로 그를 유혹한다. 그가 망설임 끝에 그 미끼를 무는가 싶더니 마지막 순간에 돈만 챙겨 해외로 달아나는 소설의 결말은 생에 대한 이런 소극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를 사랑하는 여인 안나는 그에게 전갈처럼 강하고 현명해지라며 전갈 목걸이를 선물하는데, 그는 끝내 그 목걸이를 차지 않는다.

이도 저도 아닌 회피성 결말이 아쉽다면, 그런 아쉬움을 상쇄할 만한 요소를 달리 찾아볼 수도 있겠다. 책 말미에 붙인 ‘작가의 말’에서는 “젊은 날 한때는 그 시대의 중심부에 있었으나 열외자의 길로 들어선 끝에 잊힌 존재로 생을 마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일러 “우리 현대사의 한 부분을 담당했던 그림자와 같은 존재”라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자들의 뒷전에서 한결 부차적이면서도 더욱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던 여성들은 어떠할까. 그들이야말로 ‘그림자의 그림자’로서 재평가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은 평생 동안 남편과 아들과 손자를 차례로 기다려야 했던 할머니 김덕순의 증언이다.

운명의 힘 과도…회피성 결말

“밥해 놓고 기다리고 앉았으면 그 양반이 날 저물어서야 돌아왔지. 종일토록 했을 낚시질인데 고기도 몇 마리 못 잡고. 따지고 보면 물고기 많이 잡겠다는 것도 아니었어. 그다음은 네 아비가 울산으로 간 뒤 삽짝 보며 그렇게 기다렸고. 삽짝 내다보는 게 버릇이 됐는데, 네놈이 대를 이어 이 할미를 여태 기다리게 했잖아. 하루삥(=하얼빈) 부대 앞에서 종일토록 오라비 소식 기다리다 그 양반을 만났듯, 이 늙은이 평생이 그렇게 누굴 기다리다 마칠 거야….”(163쪽)

마지막으로, 주인공 강재필이 앓고 있는 우울증에 관한 인상적인 묘사가 있다.

“자주 머리가 아팠고 그럴 때면 이상하게도 몸이 까라져 비감에 젖었다. 슬픔에는 희망이 깃들 수 없다는 말이 있듯, 먹고, 싸고, 숨쉬며 하루하루 사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시시했다. 우울증에 빠지면 눈앞의 대상이 사라져버렸다. 정신 놓아 멍해져버리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기포가 머릿속에서 보글보글 끓다 밥물 잦듯 잦아들었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242쪽)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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