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그의 몸 속에는 ‘동시 발전소’가 있나 봐

등록 2007-03-29 16:59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안도현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8000원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안도현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8000원
‘도리도리 뻐꾹/정말이다 뻐꾹’ 깜찍한 동시
‘풀벌레 소리는/말줄임표/……’ 재치 반짝 동시
‘벗나무 몸속에는/화력발전소가 있나 봐’ 상상 톡톡 동시
어린이 눈으로 쓴 안도현의 동시집
시인 안도현(46)씨가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을 펴냈다. 그가 쓴 첫 동시집이다. 안씨는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의 생리를 통해 사랑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긴 작품 <연어>로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장르를 개척한 이. 그렇다고 이번 시집이 ‘어른을 위한 동시’는 아니다. 그야말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느낌과 생각을 표현한, 귀여운 동시들이다.

“호호호호 호박꽃/호박꽃을 따버리면/애애애애 애호박/애호박이 안 열려/호호호호 호박전/호박전을 못 먹어”(<호박꽃> 전문)

“봄이 간다 뻐꾹/꽃이 진다 뻐꾹/알 낳았다 뻐꾹/남의 둥지에 뻐꾹/나는 아니다 뻐꾹/남의 둥지에 뻐꾹/알 낳지 않았다 뻐꾹/도리도리 뻐꾹/정말이다 뻐꾹/찾아봐라 뻐꾹”(<뻐꾸기> 전문)

‘호호호호’와 ‘애애애애’, 그리고 반복되는 ‘뻐꾹’은 시에 리듬감을 주면서 어린이다운 천진성을 부각시킨다. 호박꽃을 따버리면 맛있는 호박전을 못 먹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그리고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놓고서도 “도리도리 뻐꾹” 부정하는 뻐꾸기의 뻔뻔함은 읽는 이로 하여금 슬며시 웃음을 깨물게 한다.

시인의 말 다루는 솜씨는 호가 나 있다. 어른을 대상으로 한 시들에서도 그는 촌철살인의 기지와 유머,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곤 한다. 앞서 인용한 시들에서 주로 반복의 방식으로 표출된 시인의 언어 감각은 다른 시들에서도 여일하다.

“앞마당 목련꽃/빵모자 훌쩍 벗었는데//어쩌나, 목련꽃/이마 시릴 만큼//봄눈은 꼭/그만큼만 내리네”(<어쩌나> 부분)

“풀벌레 소리는/말줄임표/……//장독대 옆에서도/풀숲에서도/……//밤새도록/숨어서/……//재잘재잘/쫑알쫑알/……”(<풀벌레 소리> 전문)

할머니·콩나물·흙탕물은 ‘쉼표’


<어쩌나>에서 “어쩌나” 다음의 쉼표는 ‘어쩌나’의 탄식을 이어지는 ‘목련꽃’만이 아니라 서술부 “꼭/그만큼만 내리네”에까지 번지도록 하는 구실을 한다. ‘어쩌나’와 쉼표가 합쳐짐으로써 목련꽃의 처지가 안쓰럽다는 뜻과 아울러 봄눈 내리는 양이 얄밉다는 뜻까지를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풀벌레 소리>에서는 밤새 숨어서 “재잘재잘/쫑알쫑알” 떠들다가도 사람이 다가가면 금세 시치미를 떼고 입을 다물어 버리는 풀벌레의 속성을 말줄임표 기호로 처리하는 시인의 재치가 반짝인다.

쉼표와 말줄임표를 부리는 솜씨에 감탄하다 보니 아예 <쉼표>라는 제목의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크다가 말아 오종종한/콩나물 같기도 하고,//연못 위에 동동 혼자 노는/새끼 오리 같기도 하고,//구멍가게 유리문에 튄/흙탕물 같기도 하고,//국립박물관에서 언뜻 본/귀고리 같기도 하고,//동무 찾아 방향을 트는/올챙이 같기도 하고,//허리가 휘어 구부정한/할머니 같기도 하고,”(<쉼표> 전문)

이 시에서 콩나물과 새끼 오리, 흙탕물 자국, 귀고리, 올챙이, 그리고 할머니는 쉼표와 닮았다는 이유에서 한 자리에 불러 모아진다. 사람과 동식물, 그리고 생명 없는 물건이 쉼표와의 닮은꼴을 매개로 한 줄에 엮이는 범신론적 사고가 돋보인다.

<쉼표>와 같은 시는 시인의 날카로운 눈썰미에서 빚어져 나온 것이다. ‘관찰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시인의 관찰력이 유머감각과 적절히 버무려진 작품이 <소나기>다.

“집으로/뛰는/아이들//아이들보다/먼저/뛰는/소//소보다/앞서/뛰는/빗줄기”(<소나기> 전문)

관찰과 유머 배합된 ‘소나기’

전체 3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는 뛰는 주체가 셋이 나온다. 하늘에 시커먼 구름이 끼면서 소나기를 뿌릴 기미가 보이자 아이들은 서둘러 소를 몰고 집으로 뛰어간다. 그런데 아이들이 모는 소가 정작 아이들보다 앞서 뛰어간다. 그렇지만 제 아무리 소라 해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앞지르기란 역부족이다. 뛰기 시작하는, 그리고 시에 등장하는 순서는 ‘아이들-소-빗줄기’이지만, 뛰는 속도에서는 반대로 ‘빗줄기-소-아이들’이라는 역설과 반전에 이 시의 묘미가 있다.

안도현 시인
안도현 시인
어린이에게 읽히는 동시에 반드시 건전한 교훈이 담겨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은연중에 전달되곤 한다. <참새들>과 <수박 한 통> 같은 작품이 그러하다.

“참새는/혼자서 놀지 않는다/모여서/논다//전깃줄에도/여럿이/날아가 앉고/풀숲으로도/떼를 지어/몰려간다”(<참새들> 부분)

“보름달 같은/수박 한 통//혼자서는/먹을 수 없지/다 함께/먹어야지/나눠서/먹어야지”(<수박 한 통> 부분)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함께하는 삶과 나눔의 가치가 잘 그려져 있다. 아이들은 시를 읽으면서 참새처럼 동무들과 어울려 놀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커다란 수박은 나눠 먹어야 한다는 이치를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시인의 동시집에서 그의 다른 작품들의 흔적을 만나는 일은 가외의 즐거움이다. 가령 멀고 먼 알래스카 바다에서부터 강원도 남대천까지 힘들게 헤엄쳐 돌아오는 연어의 생태를 노래한 시 <연어가 돌아오는 날>에서 그의 어른 동화 <연어>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노릇이다. 그런가 하면 이 동시집에 실린 <밤 벚꽃>과 그의 어른용 시집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에 수록된 시 <살구나무 발전소>는 꽃의 개화를 나무 속의 발전소 덕분으로 생각하는 동일한 상상력에 입각해 있다.

“벚나무 몸속에는/불을 생산하는/화력발전소가 있나 봐/봄이면 가지 끝으로/어김없이/가닥가닥/전깃줄을 설치하고/불을 보내주는”(<밤 벚꽃> 부분)

“살구나무 어디인가에는 틀림없이/살구꽃에다 불을 밝히는 발전소가 있을 거야”(<살구나무 발전소>)

하기야 어디 어른 시 따로 아이 시 따로이겠는가. 시인 자신 이 책의 머리말에서 “무엇보다 어린이의 눈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쓰고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이 즐겨하는 ‘삼행시 짓기’ 놀이를 응용한 시 <배꼽시계>를 마지막으로 읽어 보자.

“(배) 배가 고프니?/(꼬) 꼬르륵꼬르륵/(ㅂ) 밥 먹어야 할/(시) 시간이라고?/(계) 계산 하나는 잘하네”(<배꼽시계> 전문)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실천문학사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