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창비 펴냄. 9800원
뚱보 아이라 버림받았다 여긴 서른다섯 아들
아버지 위한 다이어트 성공하자 아버지는 이미 저세상
“계획을 세우는 동안 발생하는 우연이 그 사람의 인생”
은희경표 ‘위악과 냉소’ 대신 불확실함 소설집 관통
아버지 위한 다이어트 성공하자 아버지는 이미 저세상
“계획을 세우는 동안 발생하는 우연이 그 사람의 인생”
은희경표 ‘위악과 냉소’ 대신 불확실함 소설집 관통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은희경(48)씨가 <상속>에 이어 5년 만에 펴내는 신작 소설집이다. 그 사이에 그는 장편 <비밀과 거짓말>(2005)을 낸 바 있다. 책 제목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연작시 <두이노의 비가>의 한 대목에서 빌려 왔다: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이 제목을 표제로 삼은 작품은 서른다섯 번째 생일날, 가족을 버린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다이어트에 들어가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어머니와 둘이서 살던 어린 시절부터 뚱보였던 그를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한 번씩 불러서 이태리 식당에 데려가 새우 요리를 사 주곤 하던 아버지였다. 주인공은 평생 연락이 없다가 죽음을 앞두고서야 소식이 닿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날씬한 모습을 보여주기로 결심한다. 그렇지만 웬 새삼스러운 다이어트? 제목과도 연결되는 소설 마지막 부분에 그 답이 있다:
“아버지는 뚱뚱한 아이의 기억을 갖고 떠나버렸다. 비너스를 보며 나는 생각했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멸시한다고.”(114쪽)
여기 한 아이가 있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것이 자신의 뚱뚱한 몸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삼십대 중반의 어른이 되었어도 그의 안에는 ‘뚱보 아이’가 여전히 자라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위중하다는 연락이 온다. 갑자기 그 안의 아이가 바빠지기 시작한다.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에게 내 날씬한 모습을 보여드려야 해. 그래서 떠나간 아버지를 돌아오시게 해야 해!’
주인공은, 지방은 먹되 탄수화물은 금지하는 ‘A다이어트’ 방법을 택한다. 달걀과 두부, 고기와 생선은 실컷 먹지만 밥은 먹지 않는다. 만두는 속만 먹고 만두피는 벗겨 내며, 비빔밥을 먹을 때는 설탕이 섞인 찹쌀고추장을 완전히 걷어낸 뒤 밥을 제한 나물만을 조심스레 덜어내 씹는다. 햄버거를 시켜서도 빵 안의 다진 고기만을 먹고 빵은 버린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에 숭배
다이어트는 성공이었다. 밥과 탄수화물을 향한 맹렬한 식욕을 억누르고 주변의 간섭을 물리치며 각고의 노력을 한 끝에 불과 한 달 만에 12 킬로나 뺄 수 있었다. 병원에 전화를 해 본다. 아버지는 그 사이 돌아가셨고, 내일이 발인이라는 말을 듣는다. 헐렁해진 양복을 옷장 깊숙이 넣어 두고 날씬해진 몸에 맞는 화사한 색상의 새 양복을 맞춘 주인공. 그러나 영안실로 향하면서는 새 양복 대신 벗어 두었던 헐렁한 양복을 다시 꺼내 입는다. 검은색이 그것뿐이었던 것. 날씬한 새 양복이 아닌 뚱뚱하던 시절의 낡은 양복을 입는다는 설정은 징후적이다: 영안실에 간 그는 망설임 끝에 마침내 밥을 입에 넣게 된다. “자포자기, 그리고 자기 파괴적이며 충동적인 악의가 팔에 속도를 붙였다. 잔칫집의 초대받지 않은 식객답게 입가로 국물까지 흘리면서 나는 탐욕스러운 속도로 순식간에 국밥 그릇을 깡그리 비우고 말았다.”(111쪽)
소설집에 수록된 여섯 단편 가운데 가장 최근작인 <의심을 찬양함>은 우연과 필연, 주관과 객관 사이의 착잡한 관계를 물고 늘어진다. 마음에 드는 남자와 약속한 카페에 갔더니 그 남자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남자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 그는 제 형이 주인공 여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여러 건의 우연을 가장했으며, 여자가 아는 형은 그의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통계학에서는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사실은 필연적 결과라는 걸 숫자로 증명”(18쪽)한다는 사실을 들먹일 만큼 그는 숫자와 통계, 합리성을 신뢰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여자가 믿는 것은 존 레논의 말: “우리가 계획을 세우는 동안 발생하는 우연이 바로 그 사람의 인생”(22쪽)이라는 것이다. 동생은 형이 알코홀릭이며 공황장애에 시달리는데다 장기적인 약물치료를 받고 있으며, 동생의 이름과 신분을 제 것인 양 위장해서 사는 인물이므로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자의 태도는 완강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객관적 정보가 아니에요. 설명할 수 없는 감각과 느낌이라구요.”(30쪽)
“아직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두 사람의 논전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에 대해 소설은 명쾌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경계가 모호한 쌍둥이의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필요에 따라 하나가 되기도 하고 둘이 되기도 하며 종종 서로를 바꾸며 상대방의 존재 속으로 드나드는 쌍둥이의 경우다. 그 사례에 겹쳐서 쌍둥이 형의 말이 메아리친다: “솔직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 세상이 모두 정밀하게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나는 아마 각본대로 뛰지 않는 토끼일 거예요.”(36쪽)
안개 속 풍경처럼 불투명하고 반추상화처럼 모호한 분위기는 함께 수록된 다른 작품들에서도 비슷하다. 여자중학생이 책값을 받으러 학교로 찾아온 월부 책장수 때문에 겪었던 불안과 공포를 비교적 평이하게 서술한 <날씨와 생활>. 성장한 주인공이 빗길을 운전하던 중 중앙선을 넘어온 차를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밟는다는 결말은 그 다음 상황을 불확실한 상태로 남겨둔 채 봉합되고 만다.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의 주인공은 ‘우리 약속 잊지 않았죠?’라는 수수께끼 같은 제목의 메일을 받고 그 의미와 발신자의 정체를 추적한다. 그 결과 가까스로 15년 전의 청춘을 공유했던 한 여자를 떠올린다. 그렇지만 소설이 끝나도록 그 여자와 다시 만나게 되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확인되는 것은 주인공의 불확실한 시?공간 감각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의 시간과도 단절돼 있는 것 같다. 내 인생의 모든 날과도 단절돼 있다. 오늘밤의 시간은 내 인생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예외적인 미지의 시간이다.”(210쪽)
이 책은 위악과 냉소라는 은희경 소설의 표징과는 거의 무관한 자리에 놓여 있다. 그의 소설 세계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는 뜻이 되겠다. 책 전체를 지배하는 모호함과 불확실함이 완성된 형식인지 과도적인 것인지는 아직 알기 어렵다. 지금으로서는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제로서 <지도 중독>의 주인공의 말을 들을 수 있겠다: “서른이 넘었는데도, 나도 아직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183쪽)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저자 은희경씨
소설집에 수록된 여섯 단편 가운데 가장 최근작인 <의심을 찬양함>은 우연과 필연, 주관과 객관 사이의 착잡한 관계를 물고 늘어진다. 마음에 드는 남자와 약속한 카페에 갔더니 그 남자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남자가 와서 기다리고 있다. 그는 제 형이 주인공 여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여러 건의 우연을 가장했으며, 여자가 아는 형은 그의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통계학에서는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일이 사실은 필연적 결과라는 걸 숫자로 증명”(18쪽)한다는 사실을 들먹일 만큼 그는 숫자와 통계, 합리성을 신뢰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여자가 믿는 것은 존 레논의 말: “우리가 계획을 세우는 동안 발생하는 우연이 바로 그 사람의 인생”(22쪽)이라는 것이다. 동생은 형이 알코홀릭이며 공황장애에 시달리는데다 장기적인 약물치료를 받고 있으며, 동생의 이름과 신분을 제 것인 양 위장해서 사는 인물이므로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자의 태도는 완강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객관적 정보가 아니에요. 설명할 수 없는 감각과 느낌이라구요.”(30쪽)
저자 은희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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