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에서부터 편집자 성지희씨, 정민용 대표, 박상훈 주간, 편집자 박후란씨, 안중철 편집장. 이들은 출판사 이름의 뜻이 새겨진 명함을 내놓았다. “후마니타스는 인문학을 뜻하는 라틴어로, 원래는 신에 관한 학문에 대비되는 개념이었습니다.” 이들은 책을 통해 인간과 인간 사회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첫 책으로 포문
내는 책마다 한국사회 뇌관 건드려 주목
힘있는 주제 맛있는 문장의 재밌는 책 지향
올해 목표 40종…지식 지형도 그려간다
내는 책마다 한국사회 뇌관 건드려 주목
힘있는 주제 맛있는 문장의 재밌는 책 지향
올해 목표 40종…지식 지형도 그려간다
커버스토리 / “사회과학도 된다” 보여주는 출판사 ‘후마니타스’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위기’는 해묵은 이야기다. 1980년대의 맹렬한 사회변혁 열정과 더불어 빛났던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흥성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기운이 꺾이고 색이 바랬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으로 나누어 보면, 사회과학 쪽 사정은 더욱 침울하다. 인문학은 ‘인문교양’이란 이름으로 가벼운 역사책, 심리책들이 쏟아져 나와 그나마 빈곳을 메우고 있지만, 서점의 사회과학 코너는 한산하다 못해 썰렁하다. 찾는 사람이 적다 보니 매대도 줄어 구석으로 밀렸다. 한국 출판의 위기는 엄밀히 말하면,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위기다. 실용서로 치장한 출판 외형은 화려하지만, 그 중핵은 공동화 현상을 빚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사회과학 출판은 내부 붕괴로 끝나고 말 것인가. 그렇게 절망하기엔 아직 상황은 유동적이다. 위기는 가파르지만, 그 위기를 역전시키려는 출판인들의 노력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가운데 가장 유력하고 역동적인 힘의 지원지 노롯을 하는 곳이 도서출판 후마니타스다.
후마니타스는 2002년 11월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저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첫 책으로 펴낸 이래 최근의 책 <비판적 평화 연구와 한반도>(구갑우 지음)까지 모두 26권을 펴냈다. 5년 동안 26권이면 많다고 할 수 없는 종수다. 그러나 내는 책마다 주목도와 파급력에서 유서 깊은 출판사들의 묵직한 책들을 능가했다. 후마니타스의 책들은 한국 사회의 뇌관을 건드리는 민감한 주제를 품고 있었고, 번번이 폭탄처럼 터졌다. 후마니타스라는 낯선 라틴어 명사는 지식사회의 친숙한 용어가 되었고, 이제 이 출판사의 책들를 에둘러서는 한국 사회의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로버트 달의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이은 최장집 교수의 새 저서 <민주주의의 민주화>, 노동운동가 하종강씨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 한국 진보의 위기를 탐사한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 힘있는 주제, 명확한 서술로 후마니타스의 책들은 우리 사회에 포진한 난점들의 지형도를 그렸다.
이렇게 마그마를 토해내는 출판 화산의 한가운데 박상훈(43) 주간, 정민용(36) 대표, 안중철(35) 편집장을 포함한 13명의 출판쟁이들이 들어앉아 있다. 생긴 지 5년 된 신생 출판사치고는 식구가 적지 않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이 출판사도 출발은 소박했다. 최장집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상훈 주간은 학계에 머물기보다는 바깥에서 길을 찾아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결심이 혼자만의 결심이 아니었다는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던 가까운 후배 정민용, 안중철씨가 뜻을 같이했다. 이들이 ‘도원결의’를 한 것이 2002년 2월이다. 동지가 된 세 사람은 박 주간의 친구 김재선씨가 쓰던 조그만 사무실 한켠에 세들어 출판사 간판을 내걸었다. 얼마 있지 않아 김재선씨 자기 사업을 접고 후마니타스의 영업부장으로 합류했다.
출판사의 진용은 짜였지만, 이들은 출판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 정민용 대표가 대학원 시절 아르바이트로 출판 편집과 교열을 해본 것이 경험의 전부였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기획한 책이 나오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해 내내 후마니타스는 본업과는 상관없는 편집·제작 대행을 하며 기본기를 익혔다. “대학 연구소에서 내는 단행본이나 학술지를 만들어주고 학회지도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제작 대행을 해준 게 다 합쳐서 60여종 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었다.” 정 대표는 웃으면서 그때를 회상했다.
편집·제작 대행하며 기본기 익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출판사의 꿈은 컸다. 세 사람은 후마니타스가 만들 책들의 모습을 미리 그려 선언문으로 간직했다. “도서출판 후마니타스는 사회성이 강한 책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면서도 인간 개인의 실존적 문제가 실종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판사로서 후마니타스는 말과 글을 다룹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논리와 그 기초 위애서 만들어진 제도들이 결국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는 일이 없도록, 언제나 스스로 돌아보려 합니다.”
후마니타스라는 브랜드를 단 첫 책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대단한 사회적 주목을 받았지만, 그 후로도 한동안 이 출판사의 주력사업은 제작 대행이었다. “2004년 말쯤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 그 한 해 동안 만든 책이 26종이었는데, 그 가운데 우리 이름을 단 책이 단 4종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 식구들과 난상토론 끝에 제작 대행을 확 줄이고 출판으로 정면 승부하자고 뜻을 모았다.” 박상훈 주간의 말이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외국 책 판권을 사들이고 변역을 맡기고, 기획을 강화했다. 사실상 재출발이었다. 그 재출발의 결과가 지난해부터 나오기 시작한 굵직한 책들이다.
후마니타스의 책들은 세련됐다거나 화려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단순하고 투박해 보이는 편집 디자인은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던진다. 그러나 거기에 후마니타스의 매력이 있다. 투박함은 단호함으로, 단순함은 정직함으로 독자에게 이해된다. “2005년에 <위기의 노동>을 펴냈을 때, 사람들이 표지가 아주 좋다는 평가를 해줘서 의외였다. 단순하고도 직접적으로 제목을 써 넣은 것뿐인데, 독자들이 그걸 후마니타스 스타일로 받아주었다.” 정민용 대표의 이 말에 후마니타스의 비밀 아닌 비밀이 들어 있다. 표지부터 내용까지 관통하는 정직성과 진정성이야말로 후마니타스의 브랜드 이미지인 셈이다. 이런 이미지는 후마니타스 식구들이 아마추어로서 시작해, 기존 출판편집의 문법을 깨는 새로운 시도를 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관행을 모른다는 불리한 조건을 자유로운 실험과 창조의 여건으로 바꿔낸 것이다.
스물여섯 종의 책으로 벌써 기반을 단단히 다진 후마니타스는 올해 더욱 과감한 도전을 할 생각이다. “지난해 외서 판권 계약만 50종을 했다. 출판사 이름으로 조금씩 모아두었던 1억원짜리 적금통장을 깼다. 지난해 기획한 책들이 이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올해 40종을 내는 것이 목표다. 그러려면 한 달에 3~4종씩은 내야 한다.”
표지부터 내용까지 진정성 승부
박상훈 주간은 “후마니타스의 야심은 이른바 ‘대박’을 터뜨리는 책이 아니라, 5천부에서 1만부 사이의 책을 꾸준히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1만부짜리 책을 꾸준히 내려면 기존 사회과학 출판 시장에 드리워진 독자들의 선입견이 깨져야 한다. 사회과학 책은 재미없다, 너무 어렵다는 선입견은 단단한 벽처럼 독자들의 접근을 가로막고 있다. “신선한 주제를 끌어내 맛있는 문장으로 풀어낸 책을 만듦으로써 이 벽을 뚫고 나가겠다.” 후마니타스 식구들의 의지는 단단하다.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이들의 열망이 한국 사회과학 출판의 희망을 엿보게 해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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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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