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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삶도 시도 ‘치워라, 그늘!’

등록 2007-04-19 19:41

<도장골 시편> 김신용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 7000원
<도장골 시편> 김신용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 7000원
시인 김신용(62)씨가 등단한 것은 1988년 가을, 지금은 없어진 시 전문지 <현대시사상> 창간호를 통해서였다. 그러니까 그의 활동 기간은 햇수로 어언 20년째에 이르고 있다. 그의 등단작이자 출세작은 서울역 앞 빈민가 양동에서 살았던 기억을 되살린 ‘양동시편’ 연작들이었다.

“날품팔이지게꾼부랑자쪼록꾼뚜쟁이시라이꾼날라리똥치꼬지꾼/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하루고 거르지 않고 뼈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뼛국물을 할짝이며/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어둠 속, 이 땅/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양동시편―뼉다귀집> 부분)

시집 <개 같은 날들의 기록>과 소설 <고백> <기계 앵무새> 등에서 그는 밑바닥 삶을 전전하며 체험하고 목격한 어둠의 실상을 더할 나위 없이 사실적으로 묘파했다. 그의 시를 처음 접하는 독자의 눈에 그것들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정도로 낡은 가난과 곤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소설들 역시 1920년대 신경향파 소설을 읽듯 끔찍한 고통과 숨 막히는 시련으로 뒤발되어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전, 그에게 그토록 비참한 기억만을 강요한 도시를 떠나 충북 충주의 산골 마을 도장골로 내려간 뒤 쓰여진 <도장골 시편>의 시들에서 어조와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 우선 시집 도처에 푸른 빛이 반짝이는 것이 눈에 뜨인다. 아무렇게나 펼쳐 본 페이지들에서 푸른 빛은 쉽사리 만날 수 있다.

도시 밑바닥 삶 고단한 기억 내려놓고
산골 간지 몇해, 자연의 푸른 빛에 물들어
넝쿨·청개구리 생명력과 풀·민달팽이 수행처럼
한 마리 딱다구리가 되어 써내려간 시들

“오디 먹어 푸른 잎은, 아, 푸른 입들을 매단 줄기들은”(<도장골 시편―담쟁이 넝쿨의 푸른 발들> 부분)

“소풍 나온 듯 푸르게 푸르게 들밥을 먹는다”(<도장골 시편―입하 부근> 부분)

“그 잠실에서, 나뭇잎을 갉아먹고 푸른 실을 뽑는 누에들이 아직도 살고 있는지”(<도장골 시편―달빛 방> 부분)


도장골이 비록 “사람 사는 집보다 폐가가 더 많은 마을”(<도장골 시편―감이 익었다>)이라고는 해도 그곳은 역시 푸릇한 자연을 이웃한 곳이다. 김신용씨의 새 시집에서 푸른색은 자연의 싱싱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마당에 다람쥐 두 마리가 찾아왔을 뿐인데//찾아와, 잠시 놀다 갔을 뿐인데//맨발로 마당에 나가 팔 벌려 서 있고 싶어지네//그 적신(赤身) 위에도 새가 날아올 것 같아//새가 날아와 앉아, 한나절을 놀다 갈 것 같아//아, 두 팔 벌려 맨발로 나무처럼 서 있으면//한낮의 고요 또한 푸르게 푸르게 잎 나부낄 것 같아//너와 나 사이, 끊긴 정관 이어져 맑은 물줄기의 길이 열릴 것 같아//푸른 잎사귀가 마른 뺨에서도 돋아나네//푸른 엽맥의 눈이 발 끝에서도 돋아나네”(<도장골 시편―적신의 꿈>)

“저 민들레꽃//제 이사 간 곳, 산비탈길 가시덤불 속이라 해도/꼿꼿이 펴 든 허리, 굽히지 않으리//들옷 입고 머리칼 하얗게 셀 때까지, 그 경작 멈추지 않으리”(<도장골 시편―민들레꽃>)

자연의 생명력을 노래하는 김신용씨의 시들에는 또한 수직 상승의 이미지가 빈발한다. 담을 따라 오르는 담쟁이 넝쿨, 감나무 가지를 기어오른 호박 넝쿨, 시인의 집 거실 유리문을 오르는 청개구리의 움직임 등은 분출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다/낭떠러지든 허구렁이든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갔을 것이다/모랫바람 불어, 모래 무덤이 생겼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생기는 사막을 걸어간 발자국들이/비단길을 건설했듯이/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가, 저렇게 허공중에 열매를 매달아놓았을 것이다.”(<도장골 시편―넝쿨의 힘> 부분)

자연이 약동하는 생명력만을 과시하는 것은 아니다. 폐가에 돋아난 풀들과 냇가의 돌 위를 기어가는 민달팽이는 법력 높은 스님의 수행을 연상케 할 정도로 한 소식 얻은 면모를 보인다.

<도장골 시편>의 저자 김신용씨
<도장골 시편>의 저자 김신용씨
“폐가 앞에 서면, 문득 풀들이 묵언 수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떠올릴 말 있으면 풀꽃 한 송이 피워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사람 떠나 버려진 것들 데리고, 마치 부처의 고행상처럼/뼈만 앙상해질 때까지 견디고 있는 것 같은 풀들/인적 끊겨 길 잃은 것들, 그래도 못난이 부처들처럼/세월을 견디는 그것들을 껴안고, 가만히 제 집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느낌 들 때가 있다”(<도장골 시편―폐가 앞에서> 부분)

<도장골 시편―민달팽이>는 맨 살 위에 아무런 옷도 집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민달팽이의 처지가 안쓰러워 그 위에 배추 잎사귀를 덮어 주는 시인의 아내의 행위와 그에 대한 민달팽이의 반응을 포착한 시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치워라, 그늘!”(<도장골 시편―민달팽이> 부분)

특히 마지막의 독립된 연으로 처리된 “치워라, 그늘!”에서는 선승의 할을 대하는 듯한 서늘함과 삼엄함이 느껴진다.

폐가의 풀과 민달팽이의 선 수행은 시인에게도 파급된다. 시인에게는 시를 쓰는 일이 바로 수행이 된다.

“그는 쉬지 않고 백지의 나무 등걸을 쫀다. 뾰족한 부리로 두터운 나무껍질 속을 파고들어/그 속에 굴을 파고 숨어 있는 먹이를 찾아낸다/그렇게 먹이를 쪼을 때마다 부리에는 푸른 즙이 흐른다. 엽록의 수액을 먹고 자라 몸이 푸른 벌레/그 혈거(穴居)의 언어를 쪼기 위해 직벽의 까마득한 백지에 매달려 있는 딱따구리, 뾰족한 부리의 오색딱따구리/벌레를 잡을 때마다, 부리도 푸르게 물든다”(<도장골 시편―목탁조> 부분)

자신의 시 쓰기를 딱따구리의 벌레 잡기에 비유한 이 시에서도 푸른색과 수직의 이미지는 핵심적인 구실을 한다. 김신용씨의 새 시집 <도장골 시편>은 시인이 한 마리 딱따구리가 되어 수직의 백지를 쪼아 찾아낸 푸른 벌레들의 세계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천년의시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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