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진실>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 <경제의 진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이해준 옮김/지식의날개·1만원 뉴스피크(newspeak)라는 말이 있다. 본디 낱말이 품고 있는 정치적 쟁점을 약화시키고자 만들어낸 새 낱말을 가리킨다. 흔히 완곡어법과 비슷한 것으로 여기지만, 극단적으로 말해 뉴스피크는 사기다. 이 말은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온다. 대표 격으로 ‘평화를 위한 부서’와 ‘진실을 위한 부서’를 들 수 있다. 앞의 것은 전쟁을 담당하는 부서이고, 뒤의 것은 진실을 조작하는 부서다. 갤브레이스가 보기에 ‘시장체제’야말로 이 시대를 상징하는 뉴스피크였던 모양이다. 시장체제는 자본주의를 대체한 낱말이다. 이 말에 담긴 그 무엇을 ‘살균’하고 싶은 욕망이 반영된 것이다. 갤브레이스는 〈경제의 진실〉을 이를 폭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본디 유럽에서 자본주의라는 말은 “소유주의 권력과 노동자들의 종속성을 거칠게 인정하는 표현”이었다. 미국에서는 비용의 착취를 뜻했다. 시장의 신을 믿는 신도들에게 이 얼마나 불경스럽고 치욕적인가. 그래서 “자본주의에 대한 온화한 대안”으로 시장체제라는 말을 창안해냈다. 이 낱말은 자본주의에 덧칠돼 있던 부정적인 역사를 탈색시킨데다 학구적이기까지 하다. 도대체 이런 뉴스피크로 무엇을 노렸을까. 갤브레이스는 “소비자 수요에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이를 통제하려는, 생산자 권력이란 추악한 기업의 실체를 감추려는 치사하고 무의미한 변장”이라 대답한다. 갤브레이스가 크게 우려하는 것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기업권력의 남용이고, 다른 하나는 더 짙어진 군산복합체라는 그림자다. 대기업이 현대 경제의 핵심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런데 대기업을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경영진이다. 우리의 경우 자주 확인할 수 있듯, 주주들의 역할은 기대에 한참 못 미친다. 이른바 ‘기업 스캔들’이 자주 터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막으려면 기업권력에 고삐를 매어야 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이 법적 효력을 띠어야 한다는 것이다. 클린턴의 경제교사라 불렸던 지은이는 강한 어조로 말한다. “기업권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기업이 공공부문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평화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아이젠
하워가 대통령 퇴임연설에서 한 불길한 예언이 현실이 된 지는 꽤 오래다. 특정 기업이 국방예산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게 늘어났다. 이 현상을 갤브레이스는 한마디로 “전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 했다.
경기침체 타개책은 우리에게 뜻하는 바가 많다. “소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고, 소비할 이들에게는 이를 박탈하는 정책”을 갤브레이스는 통렬하게 비판한다. 세금감면으로 부자들에게 혜택을 줘봐야 침체된 경기를 살릴 수는 없다. 그런데도 빈곤층의 구매력을 늘릴 수 있는 사회지출을 삭감하려 한다. 만약, 갤브레이스 말대로 경제 정책을 펼치면 당장 사회주의 정권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듯하다. 갤브레이스가 좌파 학자로 분류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의 민주당이 좌파가 아닌 바에야 소가 웃을 일이 아닐까.
이권우 / 도서평론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이해준 옮김/지식의날개·1만원 뉴스피크(newspeak)라는 말이 있다. 본디 낱말이 품고 있는 정치적 쟁점을 약화시키고자 만들어낸 새 낱말을 가리킨다. 흔히 완곡어법과 비슷한 것으로 여기지만, 극단적으로 말해 뉴스피크는 사기다. 이 말은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온다. 대표 격으로 ‘평화를 위한 부서’와 ‘진실을 위한 부서’를 들 수 있다. 앞의 것은 전쟁을 담당하는 부서이고, 뒤의 것은 진실을 조작하는 부서다. 갤브레이스가 보기에 ‘시장체제’야말로 이 시대를 상징하는 뉴스피크였던 모양이다. 시장체제는 자본주의를 대체한 낱말이다. 이 말에 담긴 그 무엇을 ‘살균’하고 싶은 욕망이 반영된 것이다. 갤브레이스는 〈경제의 진실〉을 이를 폭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본디 유럽에서 자본주의라는 말은 “소유주의 권력과 노동자들의 종속성을 거칠게 인정하는 표현”이었다. 미국에서는 비용의 착취를 뜻했다. 시장의 신을 믿는 신도들에게 이 얼마나 불경스럽고 치욕적인가. 그래서 “자본주의에 대한 온화한 대안”으로 시장체제라는 말을 창안해냈다. 이 낱말은 자본주의에 덧칠돼 있던 부정적인 역사를 탈색시킨데다 학구적이기까지 하다. 도대체 이런 뉴스피크로 무엇을 노렸을까. 갤브레이스는 “소비자 수요에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이를 통제하려는, 생산자 권력이란 추악한 기업의 실체를 감추려는 치사하고 무의미한 변장”이라 대답한다. 갤브레이스가 크게 우려하는 것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기업권력의 남용이고, 다른 하나는 더 짙어진 군산복합체라는 그림자다. 대기업이 현대 경제의 핵심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런데 대기업을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경영진이다. 우리의 경우 자주 확인할 수 있듯, 주주들의 역할은 기대에 한참 못 미친다. 이른바 ‘기업 스캔들’이 자주 터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막으려면 기업권력에 고삐를 매어야 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이 법적 효력을 띠어야 한다는 것이다. 클린턴의 경제교사라 불렸던 지은이는 강한 어조로 말한다. “기업권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기업이 공공부문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평화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아이젠
이권우/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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