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소녀>
칠레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집
독재 아래 신음하는 민중의 생채기 다뤄
진실과 정의가 오길 바라는 열망 큰 울림
독재 아래 신음하는 민중의 생채기 다뤄
진실과 정의가 오길 바라는 열망 큰 울림
<죽음과 소녀>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김명환 김엘리사 옮김/창비·1만8000원 루이스 세풀베다와 아리엘 도르프만 같은 칠레 출신 작가들의 작품에는 피노체트의 철권통치로 인한 상흔이 뚜렷하다. 칠레와 비슷한 역사적 아픔을 겪은 한국의 독자들이 이들의 작품에 쉽사리 공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릇이다. 차범석의 희곡을 원작으로 자신이 대본 작업을 한 뮤지컬 〈댄싱 섀도우〉 개막(7월 8일)에 맞추어 한국을 찾은 아리엘 도르프만(65·사진)의 희곡선집 〈죽음과 소녀〉가 번역돼 나왔다. 표제작을 비롯해 네 편의 희곡이 실린 〈죽음과 소녀〉에서도 칠레의 암울한 현대사는 곳곳에 아픈 자국을 남겨 놓았다. 영화 〈시고니 위버의 진실〉의 원작인 표제작은 대표적이다. 독재 치하에서 반체제 혐의로 잡혀가 끔찍한 고문과 성폭행을 당한 경험을 지닌 파올리나, 마침내 민주화를 이룬 조국에서 의문사를 규명하기 위한 조사위원회 일을 하게 된 파올리나의 남편 헤라르도, 그리고 파올리나가 자신을 고문했던 의사로 지목한 미란다 세 사람을 등장시켜 기억과 용서, 복수와 화해의 주제를 파고든다.
미란다 박사를 결박한 채 복수를 하고 자백을 받아내려는 파올리나, 그런 아내를 말리며 공식 기구를 통한 ‘합법적인’ 처리를 주장하는 헤라르도, 그리고 자신의 죄를 완강하게 부인하는 미란다가 봉착하는 갈등과 윤리적 딜레마는 칠레 현대사의 맥락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울림을 선사한다.
“그런데 왜 희생해야 하는 사람은 항상 나 같은 사람이어야 하는 거지, 왜 뭔가를 양보해야 할 때가 되면 양보를 해야 하는 건 우리여야 하지, 왜 자기 혀를 깨물어야 하는 게 나여야 하지, 왜?”(239~240쪽) 용서와 화해를 통한 역사적 상처의 극복을 주장하는 남편에게 파올리나가 내놓는 항변은 이성적 당위와 감정 사이의 괴리, 나아가 역사적 정의의 회복을 향한 비원을 아프게 환기시킨다.
작가가 시와 소설에 이어 희곡으로 다양하게 변주해 온 〈과부들〉 역시 칠레 등 남미의 군부독재 치하에서 일어난 실종과 의문사를 소재로 삼는다. 젊거나 늙은 36명의 과부들이 사는 강변 마을에 심하게 훼손된 몇 구의 시신이 떠내려온다.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은 소피아가 주검들을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이라 주장하자 다른 과부들 역시 서로 연고권을 주장하면서 일대 소동이 벌어지고 그것이 진상 규명 요구로까지 발전하자, 지역의 치안을 책임진 대위와 중위는 마침내 유혈 ‘진압’에 나선다. 다음은 진실과 정의의 회복을 다짐하는 소피아의 며느리 알렉산드라의 말이다.
“이제 끝을 내야 해. 마침내, 마침내, 끝을. 놈들은 우리에게 돌려줘야 할 거야, 죽었거나 살았거나, 우리 남자들을 돌려줘야 해. 죽었다면 살인자들을 우리에게 넘겨줘야 할 거야. 그게 정의지.”(120쪽)
도르프만이 한국 공연을 위해 쓴 2005년작 〈경계선 너머〉는 전쟁과 분단이 초래한 비극을 블랙코미디 터치로 어루만진다. 노부부가 사는 좁은 오두막의 한가운데를 국경선이 가로지르고 남편과 아내가 화장실과 부엌을 오가기 위해서도 비자가 필요해지는 부조리한 상황, 그리고 이 외로운 부부가 일찍이 헤어졌던 아들로 짐작되는 군인의 시신을 수습하는 마지막 장면은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넘어 노부부의 아픔을 한껏 부각시킨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아리엘 도르프만 지음·김명환 김엘리사 옮김/창비·1만8000원 루이스 세풀베다와 아리엘 도르프만 같은 칠레 출신 작가들의 작품에는 피노체트의 철권통치로 인한 상흔이 뚜렷하다. 칠레와 비슷한 역사적 아픔을 겪은 한국의 독자들이 이들의 작품에 쉽사리 공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릇이다. 차범석의 희곡을 원작으로 자신이 대본 작업을 한 뮤지컬 〈댄싱 섀도우〉 개막(7월 8일)에 맞추어 한국을 찾은 아리엘 도르프만(65·사진)의 희곡선집 〈죽음과 소녀〉가 번역돼 나왔다. 표제작을 비롯해 네 편의 희곡이 실린 〈죽음과 소녀〉에서도 칠레의 암울한 현대사는 곳곳에 아픈 자국을 남겨 놓았다. 영화 〈시고니 위버의 진실〉의 원작인 표제작은 대표적이다. 독재 치하에서 반체제 혐의로 잡혀가 끔찍한 고문과 성폭행을 당한 경험을 지닌 파올리나, 마침내 민주화를 이룬 조국에서 의문사를 규명하기 위한 조사위원회 일을 하게 된 파올리나의 남편 헤라르도, 그리고 파올리나가 자신을 고문했던 의사로 지목한 미란다 세 사람을 등장시켜 기억과 용서, 복수와 화해의 주제를 파고든다.
아리엘 도르프만이 차범석의 희곡을 원작으로 대본 작업을 한 뮤지컬 ‘댄싱 섀도우’ 의 리허설 장면. 예술의 전당 제공
칠레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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