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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조선 투기열풍, 현대인들 뺨치네

등록 2007-07-20 18:22수정 2007-07-20 18:26

<럭키경성>
<럭키경성>
‘땅부자’ 김기덕 ‘미두신’ 반복창 ‘금광왕’ 이종만…
1920~30년대 닥치는 대로 벌고 정승같이 쓴 사람들
권력에서 소외된 처지가 돈에 대한 집착 불러
<럭키경성> 전봉관 지음/살림·1만2000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의 지도적 평론가 겸 소설가로 활동한 팔봉 김기진(1903~1985)은 정어리 투기에서부터 금광, 주식 투기에 이르기까지 돈이 될 만한 사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생계를 위해 총독부 어용신문인 〈매일신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던 1930년대 후반의 5년 동안은 오후에는 신문사 일을 하고 오전에는 명치정 주식중매점에 나가 주식을 사고파는 ‘투잡족’으로 살기도 했다. 팔봉의 사업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거니와, 명색이 사회주의자인 그는 어쩌자고 그토록 투기성 사업에 매달렸던 것일까.

“백면서생 김기진이 금광을 하러 나선 이유는 궁핍 때문이 아니라 허무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사회를 알면 알수록 문단이나 신문사가 주는 얄팍한 권력과 명예가 하찮게 다가왔다. 세치 혀로 아무리 야유하고 비판해도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면 할수록 흔들리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었다. 혼자 고고한 척 한 발짝 물러서서 세상을 조롱해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욕망을 감추고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것보다는 최선을 다해 세상과 부딪쳐보는 것이 정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보다 강한 게 펜이라지만,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펜보다 황금이 강했다.”(106~107쪽)

〈럭키경성〉의 지은이 전봉관 교수(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의 해석이다.

〈럭키경성〉은 1920, 30년대 이 땅을 휩쓴 투기 열풍, 그리고 큰돈을 벌거나 그렇게 번 돈을 ‘잘’ 쓴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앞서 〈황금광시대〉(2005)와 〈경성기담〉(2006)으로 근대 조선의 알려지지 않은 단면을 흥미롭게 포착한 바 있는 지은이의 세 번째 책이다.

〈럭키경성〉의 첫 장은 1932년 여름 함경북도 나진에 길회선(길림~회령 철도) 종단항이 건설될 것이라는 총독부의 발표를 전후해서 전 조선 사회를 들끓게 했던 땅 투기 바람을 다룬다. 길회선 종단항의 후보지로는 나진과 함께 인접한 청진과 웅기 세 곳이 거론되어 왔으나 세 곳 중 가장 한미한 어촌이었던 나진이 낙점됨으로써 많은 사람을 울고 웃게 만들었다. 그중 제일 크게 웃은 사람이 아마도 청진 동일상회의 두취(대표이사)였던 김기덕이었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1925년 가을께 알고 지내던 일본인 관리에게서 길회선 종단항 후보지가 나진 등 세 곳으로 압축되었다는 고급 정보를 듣고서는 현지 답사를 거쳐 나진이 가장 유력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매물이 나오는 대로 일대의 땅을 사 두었던 터였다.

 ‘금광왕’ 이종만이 개발하고 매각한 영평금광의 전경 사진(이종만 유족 제공)과 한반도의 금광 열풍을 풍자한 <조선일보> 1932년 11월 29일 치 안석영의 만평.
‘금광왕’ 이종만이 개발하고 매각한 영평금광의 전경 사진(이종만 유족 제공)과 한반도의 금광 열풍을 풍자한 <조선일보> 1932년 11월 29일 치 안석영의 만평.
종단항 건설 예정지 발표를 계기로 나진의 땅값은 한 달 사이에 무려 1000배 이상 껑충 뛰었다.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돌섬과 황무지에 지나지 않았던 땅이 하루아침에 금싸라기로 신분이 바뀌었다. 김기덕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 사이 헐값에 땅을 팔아넘긴 원주민들은 후회와 분노로 실성했고, 땅을 팔지 않고 있다가 뜻밖의 횡재를 한 이들은 거꾸로 너무 기쁜 나머지 실성하는 사태도 속출했다. 반대로 청진에 종단항이 들어설 것으로 예측하고 그곳에 땅을 사 두었다가 땅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알거지 신세가 된 이들 역시 미치거나 심지어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행정수도니 신도시니 해서 ‘전 국토의 투기장화, 전 국민의 투기꾼화’를 조장하는 듯한 지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지은이 전 교수는 “한국인에게 ‘투기 DNA’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을 품지 말아주길” 당부한다. 1920, 30년대 조선인들이 금광, 미두, 주식, 부동산, 정어리 등 닥치는 대로 투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들이 ‘돈’에 비길 만큼 강력한 욕망인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던 탓이 크다는 것이다. 제목의 한자 표기인 ‘喜京城’은 그런 의미에서 반어적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럭키경성〉의 또 다른 주인공들을 만나 보자. 쌀과 콩을 현물 없이 10%의 증거금만 가지고 거래해서 시세 차액을 얻거나 잃는 미두는 식민지 조선을 휩쓴 대표적인 투기 종목이다. 일본식 이름 ‘반지로’로도 알려진 반복창은 ‘미두신’으로 일컬어질 만큼 미두에 능해 400원을 밑천으로 1년 사이에 40만원(지금 돈으로 4천억원)을 번 인물이다. 그가 1921년 5월 당대 최고의 미녀 김후동과 조선호텔에서 올린 결혼식은 당일 비용만 지금 돈으로 30억원에 이를 만큼 초호화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로부터 18년 후인 1939년 인천 외리의 허름한 네 칸짜리 움막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이했다. 투기꾼들의 정신을 빼앗고 영혼을 갉아먹는 미두의 장난이었다.

나쁜 의미의 투기꾼들만 책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창학과 방응모에 이어 세 번째 금광왕에 등극한 이종만은 거듭되는 실패를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난 이력으로도 이채롭지만, 무엇보다 그가 금광 등으로 번 돈을 농민과 노동자, 청년 학생 등을 위해 아낌없이 출연함으로써 ‘공부(公富)’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고 분단 이후 자진 월북해서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가 되었다는 점 역시 특기할 만하다. 오산학교의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이 놋그릇 등짐장수 출신으로 ‘똑바로 빨리 걷자’는 신조로써 성공을 거두었다든가,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 소속 무급 의사 알렌의 요리사였던 이하영이 ‘더듬거리는 영어’ 실력 하나로 주미대사 서리를 거쳐 외부대신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일화 등도 흥미롭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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