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18년 기다려 이혼했건만…내가 왜 이혼했지?

등록 2007-08-24 20:33수정 2007-08-24 20:43

<기다림> 하진 지음·김연수 옮김/시공사·1만2000원
<기다림> 하진 지음·김연수 옮김/시공사·1만2000원
못생긴 조강지처와 이혼하기 위해 18년 별거
그사이 젊고 쾌활한 애인은 중년의 심술쟁이로
비극도 희극도 아닌, 이런 것이 인생인가
<기다림>
하진 지음·김연수 옮김/시공사·1만2000원

중국 출신의 미국 작가 하진(51)은 단편집 〈피아오 아저씨의 생일파티〉, 장편 〈니하오 미스터 빈〉 등을 통해 국내 독자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이다. 소설가 김연수씨가 번역한 장편 〈기다림〉이 최근 그의 한국어판 소설 목록에 추가되었다.

〈기다림〉은 사랑과 증오, 기대와 환멸에 관한 소설이다. 주인공은 시골 출신 군의관 ‘린’. 부모님의 강권에 의해 마지못해 결혼한 아내 ‘수위’를 두고 그는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만나’를 사랑한다. 러시아 소설을 즐겨 읽는 감수성 풍부한 인텔리이자 헌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를 자랑하는 린, 못생기고 늙어 보이는데다 학식은 전무하고 전족까지 한 시골 여자 수위.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깨고 어디로 보나 어울리는 린-만나 커플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몸부림이 소설 〈기다림〉의 태반을 이룬다.

소설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를 거쳐 핑퐁외교와 실리주의로 나아가는 무렵을 배경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중국 사회의 굵직한 사건과 흐름은 흐릿한 배경으로 깔릴 뿐, 소설에서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린과 만나 커플의 끈질기고도 지루한 기다림이다. 결혼초 딸 하나를 낳은 뒤 아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으며 십수년째 별거를 하고 있는 린은 아내 수위에게 이혼을 설득한다. 그러나 일부종사를 신앙처럼 받드는 수위는 응하지 않는다. 시골집에 혼자 남아 병든 시부모를 봉양하고 딸을 키운 조강지처를 버리려는 그의 기도는 이혼법정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린이 마침내 수위와 법적으로 갈라서게 되는 것은 18년 동안 별거가 계속됐다면 이혼할 수 있다는 규정을 충족시킨 뒤의 일이다. 그 사이 젊고 매력적이었던 만나는 40대의 중년 여성으로 바뀌었다.

기다림의 끝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린과 만나는 그토록 고대해 왔던 결혼을 하고 아들 쌍둥이까지 낳게 된다. 겉보기에는 오랜 기다림이 달콤한 결실을 맺은 형국. 그러나 기다림의 목표가 이루어진 순간, 그 기다림을 가능하게 했던 두 사람의 정서적 유대는 오히려 느슨해지고 심지어 균열의 조짐마저 보인다. 만산의 시련을 가까스로 넘기는 듯하자 곧 이어 심장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만나의 불안한
중국 출신의 미국 작가 하진씨
중국 출신의 미국 작가 하진씨
감정 상태가 상황을 악화시킨다. 린은 18년 동안의 기다림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에 빠져든다. “쾌활한 젊은 여성에서 절망적인 심술쟁이로”(457쪽) 바뀐 만나를 겨냥해 린은 “꼴도 보기 싫은 년! 정말 싫어!”(453쪽)라고 부르짖는다.

린의 머릿속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18년 동안의 기다림이야말로 서로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증거라고 한쪽이 주장하면, 그것은 다만 타성에 따른 기다림이었을 뿐이라고 다른 쪽이 반박한다. 논쟁의 결과는? “만약 사랑과 마음의 평화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그는 후자를 택할 것이다.”(468쪽) 이제 린의 기다림은 과격하게 방향을 튼다. 술기운에 의지해 그는 조강지처에게 이렇게 애걸한다: “여보, 날 기다려줄 수 있겠소? 곧 당신에게 돌아오리다.(…) 날 버리지 마. 만나는 오래 살아봐야 일이 년이야.”(473쪽)

이런 것이 인생인가. 비극도 희극도 아닌 이런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