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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여전히 살아 숨쉬는 전통종교의 힘

등록 2007-12-07 20:14

〈비단꽃 넘세〉
〈비단꽃 넘세〉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

〈비단꽃 넘세〉 김금화 지음/생각의나무·1만2000원

“도전히 안 되겠는데, 아무래도 자주수건을 써야 낫겠어.”

피하고 싶었던 운명이었으리라. 외할머니가 무당이었으니 그 서러움이 얼마나 큰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에둘러 갈 수 없었다. 어릴 적 이미 다른 사람들의 앞날이 보였고, 둥근 낫 위에서 춤추지 않았던가. 마침내 무병을 앓았고, <옥추경>을 읽어 귀신을 쫓아내려 했으나, 독경사가 내뱉은 말이 그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이었다.

아들을 학수고대하는 집에 둘째 딸로 태어나 이름이 넘세였다. 남동생이 어깨 너머로 넘어다 보고 있다는 뜻이다. 가난하고 배고픈 유년시절이었다.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 더 형편이 어려웠다. 이웃마을로 민며느리격으로 시집 갔다 고된 노동과 시집살이에 지쳐 도망나왔다. 자갈밭이거나 가시밭만이 펼쳐졌지 그 어디에서도 비단길이 열릴 조짐은 없었다.

이제 무당의 길로 가는 외손녀에게 외할머니는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그 어린것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한번도 따스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그 불쌍한 것이, “이제 무당이 되어 험하고 냉정한 세상에서 숱한 상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구나.” 외할머니의 말은 예언이었다. 만신 김금화의 삶이 꼭 그렇게 되었으니 말이다.


<비단꽃 넘세>는 김금화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보여준다. 짐작한 대로 평탄한 길을 걷지 못했다. 무당 수업은 엄했다. 잘도 참아낸 데다 영특해 큰 무당이 될 기미가 자주 보였다. 외할머니는 아무래도 금화를 질투했던 듯싶다. 그 자신이 큰 무당이었기에 그러했을 터다. 사랑에도 속았다. 의지가지없는 남자와 살림을 차려 알콩달콩 살아가려 했으나 끝내 떠나가버렸다. 그러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을 위해 빌어주며 살아왔건만 내 신세는 왜 이렇게 한심할까?”라고 한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나, 그게 무당이 가야 할 마땅한 길이었다고 김금화는 회고한다. 무당이 먼저 상처받고 눈물 흘려 보아야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잘 알 수 있는 법이기에 그러하다. 어차피 “무당은 모든 사람들의 한과 눈물을 보듬어 안아야 하는 사람”이지 않던가. 해야 할 일이 또 있단다. 신과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 구실을 말한다. 사람의 편에 서서 신을 달래고 사정하기도 한다. 거꾸로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한다. 공수할 적에 보이는 그 엄한 표정을 떠올리면 될 성싶다. 한마디로 무당은 “신의 밥을 먹고 신의 잠을 자고 신의 걸음을 걸어야” 하는 신의 아기라는 말에 주억거리게 된다.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이 책을 읽으며 받는 감동은, 근대화의 폭력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살아 남은 전통종교의 힘이다. 한낱 미신으로 치부하며 ‘열등’한 것으로 분류했음에도 그 명맥이 끊이지 않았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그토록 무속에 잔인하게 굴었던 것일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이루고자 그토록 무당을 업신여겼던 것일까. 그렇다면 또다른 질문이 쏟아져 나온다. ‘고등’하다 자부한 종교들이 우리네 삶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무엇을 해왔던가. 근대의 끝자락에서 목격하는, 이성과 계몽이 남긴 후유증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제는 아프고 힘겨운 인생도 그만큼 공부가 되고 덕이 되는 일이니 행복도 불행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했으니, 혹여 그것이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인지도 모르겠다.

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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