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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교묘한 인과관계로 엮어낸 성장기

등록 2007-12-28 20:22

〈구덩이〉
〈구덩이〉
한미화의 따뜻한 책읽기/

〈구덩이〉
루이스 새커 지음·김영선 옮김/창비·9000원

올해 출판계의 새로운 현상 중 하나는 청소년 출판의 성장 조짐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청소년 출판이란 시장성이 너무 협소하여 적극적으로 시도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깨끗이 포기할 수도 없는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다.

문학전집부터 요즘의 ‘라이트노벨’에 이르기까지 청소년은 늘 나름의 책을 읽고 자란다. 하지만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독자인 청소년을 염두에 두고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어린이출판과 마찬가지로 청소년출판은 사회변혁을 꿈꾸는 운동이었다. 부조리한 교육현실을 고발하고, 청소년들이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교육운동의 산물이었으며 푸른나무, 실천문학, 내일을여는책 같은 출판사들은 모두 이런 이유에서 청소년출판을 시작했다. 운동성은 그러나 대중성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걸음마는 떼었으나 그 후 오랫동안 청소년출판은 잠들어 있었다. 청소년출판을 깨운 건 운동이 아니라 입시제도의 변화다. 1994년 대학수학능력시험 도입과 2000년대 중반이후 수능 제도의 변화가 예고되며 논술이 중요해지면서 덩달아 청소년문학과 교양서가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특히 중견 출판사들이 새롭게 청소년문학 시리즈를 선보였고, 청소년문학상이 여럿 신설되며 신진 작가가 등장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루이스 새커의 〈구덩이〉 역시 ‘청소년 문학선’의 한 권으로 출간됐다. 2003년 디즈니에서 영화로 만들 정도로 대중성이 높고, 1999년 뉴베리 메달까지 수상했으니 작품성 또한 인정받은 책이다. 작품은 크게 세 가지 이야기가 교차되며 전개된다.

첫째는 뚱뚱한 소년 스탠리의 이야기다. 스탠리는 유명한 야구선수의 운동화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초록호수 캠프’라는 소년원에 끌려간다. 거기서 소년들은 인격수양을 위해 하루에 한 개씩 구덩이를 파는 중노동을 한다. 시간이 흐르며 구덩이 파기는 인격수양이 아니라 다른 음모가 숨어 있음이 드러나며 이야기는 급진전한다. 둘째는 스탠리의 고조할아버지의 이야기다. 한 여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집시 여인의 도움을 받고 모종의 대가를 치르기로 약속하지만 지키지 못했다. 그 결과 스탠리 집안은 대대로 저주를 받게 된다. 셋째는 흑인 양파 장수를 사랑한 백인 여선생 케이트 바로의 슬픈 이야기다.



한미화의 따뜻한 책읽기
한미화의 따뜻한 책읽기
언뜻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은 무릎을 칠 만큼 교묘한 인과관계로 엮여 들어가며 독자를 잡아끈다. 언뜻 마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킬 만큼 몽환적이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소도구 등은 어느 하나 우연한 것이 없다. 여기에 모든 재수없는 일은 집시 여인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고조할아버지 탓이라 여겼던 소년은 이제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체적 존재로 거듭난다. 설명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면서 소설적 재미가 가득한 〈구덩이〉를 읽으며 이 정도라면 교사와 청소년,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선택이 되지 않을까 싶어 즐거웠다.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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