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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삶의 지문’ 엮는 기억 되살릴 480가지 물음

등록 2008-01-04 21:44

‘삶의 지문’ 엮는 기억 되살릴 480가지 물음
‘삶의 지문’ 엮는 기억 되살릴 480가지 물음
〈내 인생의 자서전 쓰는 법〉
린다 스펜스 지음·황지현 옮김/고즈윈·1만1000원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유일한 진실”
문장마다 물음표 달고 회상 이끌어내
연애편지 쓰듯 불편하되 행복한 경험

조각 하나. “생계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새벽 6시면 일터에 나가시는 어머니 옆에는 늘 막둥이가 있었다. 어느 해 어린이날, 어머니는 500원을 주시고 일하러 가셨다. 나는 너무나 좋아서, 정신없이 가게로 달려갔다. 자두맛 사탕을 가득 사서 먹었다. 볼이 터질 듯 커다란 사탕은 왜 그리 빨리 녹던지…. 지금도 그 풍경을 돌아보면, 눈물이 많이 난다.”

조각 둘. “11살, 친구 김영재를 만나 그를 가르치는 과외 선생이 되다. 큰 부자였던 그 친구네 집은 동화책에 나오는 아름다운 저택을 닮았다. 6학년 때, 영재는 전교 어린이회장이 되었다. 소풍 가는 날, 운동장에서 만난 영재는 나에게 초콜릿 하나를 주었다. 내 가방에는 김밥조차 들어 있지 않았다. 쓸쓸한 소풍이었고, 배고픈 시절이었다. 13살, 현수와 가영, 두 여자친구를 만나다. 지금은 엄마가 되었을까. 나는 현수를 더 좋아했다. 졸업식 무렵의 밸런타인데이, 현수와 가영은 우리집에 찾아와 초콜릿을 주고 갔다. 그 초콜릿에 사랑이 묻어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나는 순수했으나 무지했다.”


〈내 인생의 자서전 쓰는 법〉
〈내 인생의 자서전 쓰는 법〉
조각 셋. “육군사관학교를 중퇴한 뒤, 고향 책방으로 ‘망명’했다 군 입대. 제대하고 나선 주유소에서 ‘총잡이’로 일하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봄날, 버스를 타고 가던 나의 등 뒤로 발랄한 여대생들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별안간 솟아오르는 눈물 속에서 스물다섯 청년의 초라한 현실과 그들의 마냥 행복해 보이는 풍경이 또렷이 대비되었다. 그때 내 삶의 여름이 지났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이처럼 조각난 기억들을 모으고 꿰는 것. 추억의 윗목으로 밀려난 것들을 호명하고 빛을 비추는 것. 그런 행위들을 통해 우리는 과거를 복원한다. 누구나 이런 ‘기억의 시침질’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웃다 찡그리고 눈물짓다 아련해 안타까워했던 사람은 안다. 클릭 한번으로 이루어낼 수는 더더욱 없기에, 바라지만 섣불리 시작도 못 한다. 삶의 값진 선물이지만 자서전 쓰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간결하되 얕지 않고, 체계를 이루되 속박하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린다 스펜스가 지은 〈내 인생의 자서전 쓰는 법〉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자신도 자서전을 쓰고 있다는 지은이는 말한다. “꼭 기억하세요. 이 이야기는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것입니다. 당신만의 언어가 진실한 이야기를 만듭니다.” 언어가 정신의 지문이라면 자서전은 삶의 지문이므로, 복잡한 기억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필요한 게 있다. 그것은 ‘물음’이다. 물음을 뼈대 삼아 켜켜이 쌓인 과거를 불러내 살을 붙이는 식이다. 지은이는 무려 480가지 물음을 마련해두고 독자들을 채근한다.

대답해 보라.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시절의 ‘당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10대 시절 경험한 여름밤에 대한 느낌을 적어 보라, 별자리를 바라보며 나눈 대화나 품었던 희망은?’ ‘언제 진짜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는가’ ‘결혼생활 초기를 묘사해 보라’ ‘부모로서 가장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순간은?’ ‘살아온 인생을 놓고 볼 때 그 시기 중 가장 좋았던 때는 언제였는가’

질문들 앞에서 망설이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모든 인생은 일어났던 사건이나 무대에 관계없이 고유의 가치”가 있으며 “누군가 자신의 경험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지나치게 꾸미는 일 없이 기록한다면 다른 이들과 충분히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말한바 “인간 심리의 가장 솔직하고 자유롭고 시적인 결과물은 연애편지”이므로, 새해 오늘 ‘나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쓰고 싶다면 이 책을 교과서로 삼아도 좋겠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물음표를 달고 회상을 추궁하는 책. 그 유혹을 못 이겨 ‘기억 속 앨범’을 이리저리 뒤적이다 보면 책 읽기는 한없이 느려진다. 그것은 불편하지만 행복한 경험이며, 자서전 쓰기는 자신을 향한 ‘사랑의 연습’이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사진 고즈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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