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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구름 비빔밥 만들어 한 양푼씩 먹일까

등록 2008-01-18 20:26수정 2008-01-21 11:24

〈간절하게 참 철없이〉 안도현 지음. 창비·6000원

최근 관심사인 음식을 노래한 시편들
정성 담은 여자들과 재료에 감사하고
인간에 먹히는 뭇생명엔 슬픈 공감

안도현(47·사진)씨가 신춘문예에 당선한 것은 1984년. 올해로 시력(詩歷) 25년을 맞은 그가 아홉 번째 신작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를 묶어 냈다. 새 시집은 크게 세 개의 부로 나누어졌는데, 가운데 제2부가 최근 그가 주력하고 있는 음식 관련 시들로 꾸며졌다.(〈한겨레〉 2006년 9월8일 ‘18℃’ 섹션 15면)

“비 온다/ 찬 없다// 온다간다 말없다// 처마 끝엔 낙숫물/ 헛발 짚는 낙숫물// 개구리들 밥상가에/ 왁자하게 울건 말건/ 밀가루반죽 치대는/ 조강지처 손바닥/ 하얗게 쇠든 말든// 섰다 패를 돌리는/ 저녁 빗소리”(〈수제비〉 전문)

말없이 집을 나가 어디선가 화투 패나 돌리고 있는 서방이 딴은 괘씸하기도 하다. 그런데도 시를 읽는 동안 어쩐지 온기가 차오르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왁자한 개구리 울음과 밀가루반죽 치대는 처의 바쁜 손놀림이 비 오는 저녁의 가라앉은 공기에 아연 활기를 불어넣기 때문이리라. 아울러서, 수제비라는 재래의 음식이 환기시키는 원초적 기억이 읽는 이의 몸과 마음을 두루 배부르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이처럼 음식을 노래한 시편들은 그 음식을 나누어 먹었던 공동체를 향한 그리움을 촉발시키고, 음식을 만들어 먹였던 여자들과 음식의 재료가 된 모든 숨탄것들에 대한 감사의 염을 불러일으킨다. 안도현의 음식 시들에서 무말랭이는 “외할머니가 살점을 납작납작하게 썰어 말리”(〈무말랭이〉)는 것으로 이해되며, “콩밭 고랑 사이사이에 씨 뿌린 열무”는 “벌레도 사람도 반반씩 사이좋게 나눠먹는”(〈콩밭짓거리〉) 음식이 된다. “식구들이 모두 달라붙어 키운 염소를” 잡게 되면 “우리 식구는/ 어미젖을 빠는 어린 염소들마냥/ 염소고기에 달라붙어 겨울을 보냈다”(〈염소 한 마리〉).


안도현 시인.
안도현 시인.
〈스며드는 것〉이라는 시는 게장의 재료가 되는 어미 게의 처지에서 게장 담그는 과정을 노래한다. 등판으로 쏟아지는 간장으로부터 뱃속의 알을 보호하고자 꿈틀거리며 몸을 웅크리던 꽃게는 어느 순간 체념하듯 상황을 받아들이고 알들에게 말한다: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미각을 돋우는 게장의 오묘한 맛은 어미 게의 이토록 먹먹한 아픔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자동차에 치인 토끼를 짠해하다가도 서무실에서 끓인 토끼탕과 소주 한잔에 반색하는 ‘안 선생’(〈눈 많이 온 날〉)에게서 보듯 인간과 뭇 생명은 자주 먹고 먹히는 관계로 만난다. 그러나 계란처럼 삶아 먹으라며 후배가 준 기러기 알을 가슴에 품고 그 알/기러기의 못다 이룬 비상(飛上)의 꿈을 대신 꾸는 〈기러기 알〉의 주인공처럼 인간과 자연은 또한 공존과 공감으로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어쩔거나, 물에 뜬 구름들 불러모아 비빔밥을 만들어 저자의 중생들에게 한 양푼씩 먹일까, 수면에 욜랑욜랑 무늬를 짓는 빛의 시문(詩文)을 베껴두었다가 밤 들면 어두운 창가에 걸어나 볼까, 이 계곡에 산다는 어름치의 집을 방문해 그 새끼들에게 공책값이라도 쥐여줄까”(〈탁족도〉 부분).

자연 또는 타자와 하나 되는 유력한 방법이 그들의 울음을 대신 우는 것이다. 편대를 이루어 날아가지 못한 “그녀(=기러기 엄마)의 울음소리를 생각하”(〈기러기 알〉)거나, “허공에도 울음을 적는 저 넘치는 필력을”(〈고니의 시작(詩作)〉) 배우고자 할 때, 그리고 “멀리 가보고 싶어 자꾸 번지는 (기차의) 울음소리를”(〈기차〉) 새겨들을 때 ‘곡비로서의 시인’의 면모는 확연하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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