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눈물 사용법〉
데뷔작 때의 파괴적·극단적 욕망 대신
‘눈물’을 매개로 보편적 가치에 눈 돌려
형식과 내용에서 새로운 모색 엿보여
‘눈물’을 매개로 보편적 가치에 눈 돌려
형식과 내용에서 새로운 모색 엿보여
〈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창비 펴냄·9800원 천운영(37·사진)씨의 지난 소설집 〈명랑〉(2004)에는 유난히도 할머니의 젖에 관한 언급이 많았다. 표제작 〈명랑〉을 비롯해 〈세 번째 유방〉 〈아버지의 엉덩이〉 〈모퉁이〉와 같은 작품들에서 쭈글쭈글하지만 부드러운 할머니의 젖은 마음 허한 손주들에게 엄마의 젖을 대신해 위안과 격려를 건네곤 했다. 새로 나온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에 수록된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에도 할머니의 가슴을 만지는 소년이 등장한다. 말끔한 허벅지의 주인인 이 소년은 소설의 말미에서 쪼그라든 할머니의 누드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는다. 이 소설에서 소년의 시선과 구분되는 것이 사진관 주인인 사내와 그의 아내다. 아내가 뜨거운 열정과 욕망의 덩어리라면, 그런 아내를 혐오하면서 “여자의 가슴을 훔치고, 다리를 자르고, 엉덩이를 확대해 카메라에 담는”(13쪽) 사진관 사내는 차가운 분석적 태도를 표상한다. 뜨겁거나 차가운 이 부부의 대척점에 서는 것이 소년이 선사하는 “알 수 없는 열기와 따뜻함”(32쪽)이라 하겠다. 등단작인 〈바늘〉의 집요하고도 탐미적인 욕망, 그리고 그 작품을 표제로 삼은 첫 소설집에 수록된 〈숨〉과 〈등뼈〉 등의 작품에서 인상적으로 묘사되었던 육식성의 세계에서 천운영은 상당히 멀리 떠나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책에 수록된 〈노래하는 꽃마차〉에도 육식성의 흔적은 남아 있다. 그러나 남자의 사랑이 내리친 채찍에 맞아 제 몸에 꽃물을 들이는 주인공 여자에게서는 동물성보다는 식물성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노래하는 꽃마차〉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여자의 몸에 상처를 남기는 사내의 채찍이 폭력적 남근의 상징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에서는 여성 성기를 일러 “시커멓고 음흉하고 변덕스러운 구멍”(27쪽)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형태와 역할은 다르지만, 남녀의 성기가 모두 파괴적 욕망의 집행자로서 부정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아마도 “구멍이자 돌기인 배꼽”(13쪽), 또는 역시 구멍이자 돌기인 〈내가 데려다줄게〉의 ‘노래하는 탑’이 아닐까. 남근도 바기나도 아니지만 욕망과 동경의 대상이 되는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그리고 〈그녀의 눈물 사용법〉에서 주인공 여자가 마침내 레즈비언으로서의 성 정체성을 확인하는 결말은 남성과 여성의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욕망을 지양하는 중성적 가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알리라는 이름을 지닌 혼혈 소녀, 우는 남자들과 울지 않는 여자들(〈그녀의 눈물 사용법〉) 역시 천운영 소설에서 성 정체성과 역할이 뒤섞이는 양상을 보여준다.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을 하나의 틀에 꿰어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막연하나마 상처와 치유라는 보편적 주제를 들 수 있을 따름이다. 주제만이 아니라 형식과 내용에서도 다채로운 모색의 흔적이 엿보인다. 속죄의 죽음과 부활을 관념적으로 그린 〈내가 데려다줄게〉, 일종의 메타소설인 〈내가 쓴 것〉, 콩트적 발상으로 중산층 여성의 허위의식을 꼬집은 〈백조의 호수〉 등은 한 작가의 작품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면모를 보인다. 생살에 한 땀 한 땀 문신을 새기듯 하던 날카롭고 치밀한 문체 대신, 다소 느슨하고 헐렁해진 문장 역시 큰 변화다. 천운영씨가 등단작에서부터 평론가들의 한결같은 찬사를 들었던 확고한 ‘자기 세계’에서 떠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다음 행선지가 어디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같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천운영 지음/창비 펴냄·9800원 천운영(37·사진)씨의 지난 소설집 〈명랑〉(2004)에는 유난히도 할머니의 젖에 관한 언급이 많았다. 표제작 〈명랑〉을 비롯해 〈세 번째 유방〉 〈아버지의 엉덩이〉 〈모퉁이〉와 같은 작품들에서 쭈글쭈글하지만 부드러운 할머니의 젖은 마음 허한 손주들에게 엄마의 젖을 대신해 위안과 격려를 건네곤 했다. 새로 나온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에 수록된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에도 할머니의 가슴을 만지는 소년이 등장한다. 말끔한 허벅지의 주인인 이 소년은 소설의 말미에서 쪼그라든 할머니의 누드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는다. 이 소설에서 소년의 시선과 구분되는 것이 사진관 주인인 사내와 그의 아내다. 아내가 뜨거운 열정과 욕망의 덩어리라면, 그런 아내를 혐오하면서 “여자의 가슴을 훔치고, 다리를 자르고, 엉덩이를 확대해 카메라에 담는”(13쪽) 사진관 사내는 차가운 분석적 태도를 표상한다. 뜨겁거나 차가운 이 부부의 대척점에 서는 것이 소년이 선사하는 “알 수 없는 열기와 따뜻함”(32쪽)이라 하겠다. 등단작인 〈바늘〉의 집요하고도 탐미적인 욕망, 그리고 그 작품을 표제로 삼은 첫 소설집에 수록된 〈숨〉과 〈등뼈〉 등의 작품에서 인상적으로 묘사되었던 육식성의 세계에서 천운영은 상당히 멀리 떠나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책에 수록된 〈노래하는 꽃마차〉에도 육식성의 흔적은 남아 있다. 그러나 남자의 사랑이 내리친 채찍에 맞아 제 몸에 꽃물을 들이는 주인공 여자에게서는 동물성보다는 식물성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소설가 천운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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