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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독자여, 얇은 책도 두껍게 즐기시라

등록 2008-03-14 20:10

독자여, 얇은 책도 두껍게 즐기시라. 김영훈 기자.
독자여, 얇은 책도 두껍게 즐기시라. 김영훈 기자.
〈책을 읽는 방법〉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김효순 옮김/문학동네·1만원

〈작가는 왜 쓰는가〉
제임스 미치너 지음·이종인 옮김/예담·1만2000원

‘속독 콤플렉스’ 지적하는 일본 신예 소설가
참호 속에서 명작 감식해낸 미국 대표 소설가
천천히 읽기·완숙한 글쓰기 지침 전해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 읽기여.”

김명수의 시 ‘하급반 교과서’(1983)는 군부 독재가 판치던 ‘겨울 공화국’에서 책 읽기가 어떠했는지를 꼬집는다. 시인이 무조건의 복창과 무비판의 동어반복을 날카롭게 드러내던 때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났다. 오늘의 책 읽기는 이제 쓸쓸하지 않을까. 일본의 신예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33)는 단연 아니라고 말한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외로 무신경”하고 “되도록 빨리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속독 콤플렉스에서의 해방’이라는 깃발 아래 그가 쓴 〈책을 읽는 방법〉이 번역돼 나왔다.

히라노는 에두르지 않고 ‘슬로 리딩(천천히 읽기)으로 매력적이고 창조적인 ‘오독’을 즐기자’고 말한다. 책은 슬로 리딩의 기초·테크닉·실천편으로 구성돼 있다. 기초편에서 그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양에서 질로, 망라형 독서에서 선택적 독서로 전환하라고 충고한다. 속독을 통해 단시간에 많은 정보를 얻는 게 무의미하다고 논박한 뒤, 단지 ‘내일’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오 년, 십 년 후’를 위한 독서가 슬로 리딩이라는 점을 자신의 경험에 녹여 찬찬히 풀어낸다.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 하면 떠오르는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을 무려 이십 년에 걸쳐 저술했다는 예를 들며 농익은 사상을 이해하려면 그에 걸맞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고도 설득한다. “속독법으로 일 분에 삼십 페이지나 되는 분량을 맹스피드로 눈에 새겨넣고는 이해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까? 그것은 최상의 보르도를 단숨에 마셔버리는 것과 같은 부끄럽고 천박한 짓이 아닐까?”



〈책을 읽는 방법〉(왼쪽) 과 〈작가는 왜 쓰는가〉.
〈책을 읽는 방법〉(왼쪽) 과 〈작가는 왜 쓰는가〉.
2부 테크닉편에선 본격적으로 ‘오독의 매력’을 권장한다. 속독이 전파하는 ‘이해율 70%’는 한마디로 사기이고 항상 사전을 곁에 두고 ‘왜’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책을 읽어야 하며, ‘앞으로’ 내닫기 위한 게 아니라 ‘깊게’ 들어가는 읽기가 필요한데다, 남에게 설명한다는 마음을 먹으면 더 좋다는 것에 이르기까지 숨가쁘게 ‘기술’을 펼쳐보인다. 사르트르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오독’하지 않았다면 독자적인 실존주의는 형성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지독(遲讀·느리게 읽기)이 지독(知讀·지혜로운 읽기)이라는 히라노의 신념은 책에 대한 사랑과 맞물려 있다. “외관의 변화는 사진이나 동영상이 보존해준다. 그러나 내면의 변화를 실감나게 해주는 것은 책이다.” 3부에서는 실제 작품을 들어 1·2부의 ‘이론’을 적용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 1-앎의 의지〉 등 여덟 권을 꼽았다.

히라노 게이치로가 젊은 스타 작가답게 자신의 책 읽기 방법론을 대담하게 펴는 데 견줘, 제임스 미치너(1907~1997)의 〈작가는 왜 쓰는가〉는 팔순을 넘긴 작가의 완숙한 글쓰기를 엿보게 한다. 호텔 야간경비원으로 일할 만큼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미치너가 출판사 편집자를 거쳐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성장하는 과정이 곡진하다. 괴팍한 미술품 수집상과 벌인 웃지 못할 싸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가 평단의 혹평을 받던 때, 한국전쟁에 참전해 참호 속에서 교정쇄를 읽고는 작품의 가치를 인정한 감식안이 돋보인다.

‘사랑의 습관이 사랑에 대한 모독’이라면, 속독의 습관은 책에 대한 모독일지 모른다. 청년과 노년 작가의 책 두 권은 ‘얇은 책도 두껍게 읽어야 한다’는 전언을 서로 다른 목소리로 보내고 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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