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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한살이에 한결같은 봄빛 있으매

등록 2008-03-28 22:13

정지아 소설가
정지아 소설가
〈봄빛〉
정지아 지음/창비·9800원

생성부터 소멸까지 ‘순환의 긍정성’ 탐구
역사속 통증 달래는 남도사투리 구수

정지아(43) 소설집 <봄빛>은 딱 이맘때쯤의 봄빛에 흥건히 젖어 있다. 책은 그야말로 봄빛으로 시작해서 봄빛으로 끝난다.

“봄빛은 생떼난 아이처럼 천지사방 흩날리는 흙먼지를 오냐오냐 다독이고, 생명을 싹틔우기 위해 마른 흙을 풀썩풀썩 들이받는 새싹의 여린 손을 오냐오냐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못>)

“이리 오씨오예. 요기 봄벹 밑으로. 인자 서산으로 해가 기울어 봄벷이 요만치배끼 안 남았제만 그러먼 워떻소. 우리 둘이 해바라기할 만은 허그만이라.”(<세월>)

표제작에 앞서 만나게 되는 첫 작품 <못>에서 봄빛은 새싹의 푸릇한 신생을 돕는 조산원으로 등장하고, 마지막 작품 <세월>에서 봄볕은 노부부의 아스라한 석양을 지키는 간병인으로 구실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의 길고도 짧은 한살이에 봄빛(봄볕)은 한결같이 입회한다.


무언극을 연상시킬 정도로 고요한 소설 <풍경>에는 “백살을 바라보는 노망든 할망구와 벌써 환갑을 지난, 세상과 섞여본 일 없는 늙다리 아들”이 지리산 외딴 오두막집의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봄볕을 쬐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만이 아니라 나무와 풀과 온갖 산짐승들이 역시 “그 볕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영원처럼 느리게 그러나 쏜살같이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낡아 부스러질 듯한 두 개의 기둥처럼 어머니와 그는 세월을 버티고 있었다.”


〈봄빛〉
〈봄빛〉
늙은 아들과 더 늙은 어미가 스러질 듯 버티는 세월은 그러나 겉으로 보는 것처럼 고요한 것만은 아니다. 이들이 지나온 시간 속에는 “산사람을 따라간 두 형”과 “세상으로 날아가 버린 막내형”이 생채기처럼 또는 옹이처럼 박혀 있다. 치매에 걸린 노모에게 여수 14연대를 따라 입산한 두 아들의 기억은 악성 충치처럼 언제까지나 생생한 통증으로 남아 있다. 빨치산을 등장시킨 것은 이 작품말고도 <못>과 <순정> <세월> 등 몇 작품이 더 있는데, 빨치산 부모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빨치산의 딸>(1990)로 활동을 시작한 작가다운 면모라 하겠다.

빨치산 체험을 비롯한 역사의 격동이든 역사와 무관한 개인사의 곡절이든 신생과 쇠락이 갈마드는 세월 속에서 상처는 아물고 갈등은 해소되며 이윽고 저물녘의 봄볕과도 같은 휴식과 평화가 찾아온다. 여투어 둔 저금의 용처를 두고 아옹다옹하던 반푼이 조카와 팔십줄의 작은어머니(<못>), 치매 선고를 받은 남편과 평생을 그 시하에서 숨죽이고 살아온 아내(<봄빛>), 그리고 전쟁통에 각기 빨치산과 경찰로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두 남자(<순정>)는 위대한 시간의 거룻배에 올라 용서와 화해의 건너편 기슭에 가 닿을 수 있게 된다. 그럴진대는 죽음조차도 소멸의 부정성보다는 순환의 긍정성으로 넉넉히 감싸이게 된다.

“세월은 가랑비맹키 짜작짜작 흐름시롱도 황톳물맹키 오만 기억을 다 집어생켜갖고라, 암것도 없이라, 누런 제 빛깔로 싹 쓸어가분갑그만이라. 그렇게 한세월이 흘러가고나먼 쌓인 황토 우에 또다른 목심들이 아웅다웅 살아가겄지라.”(<세월>)

치매 남편을 향한 노파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세월>을 두고 ‘육자배기요 지리산 타령’(김윤식)이라 평한 이도 있었지만, 정지아 소설들이 적극 활용하고 있는 남도 사투리는 리얼리즘의 위의에 효과적으로 복무한다. 그러나 빨치산 출신자든 치매 환자든 주로 노인들을 그려 온 작가가 <스물셋, 마흔셋>과 같은 작품에서는 육체를 발견하고 욕망에 눈뜨는 주인공을 등장시킨 데서 보듯 정지아 소설은 지금 모종의 변화를 향해 가고 있는 듯하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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