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사회진화론에 비춘 한국적 ‘생존경쟁’

등록 2005-04-22 16:31수정 2005-04-22 16:31

 우승열패의 신화<br>
\\
우승열패의 신화
\\
‘생존경쟁’.

얼마나 우리 안에 깊숙이 파고들어 우리 삶을 지배하는 말인가. 처음 말을 하기 무섭게 시작되는 한글·영어 배우기 열풍, 학교 안 일상을 지배하는 성적 경쟁, 자살마저 부르는 입학·입사 시험, 그리고 직장 안 승진 경쟁까지…. ‘인생은 전투’이며 ‘세계는 전장’이다! 이쯤 되면 개인의 경쟁력과 국가의 경쟁력은 세상 이치의 제1원리라도 된 듯하다.

러시아 출신의 귀화 한국인 박노자 교수(32·노르웨이 오슬로대학·한국학)는 후세대가 지금의 한국 사회를 이렇게 평가할지도 모른다고 전한다. “전통사회에서 유교적인 규범이 사회와 개인의 일상생활을 철저하게 통제한 것처럼, 근대사회가 후기적 위기의 시기에 접어든 1990년대부터 ‘경쟁’과 ‘생존’은 한국인의 ‘전투적’ 생활양식의 키워드가 됐다.” 지난 2002년 월드컵축구 때 우리 사회 보수와 진보 모두를 열광시킨 스포츠 애국주의에서도 그는 ‘세계는 전장, 우리는 뭉쳐야 살아남을 부대’라는 강력한 코드를 바라본다.

그가 새로 낸 책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신화>는 ‘경쟁’ ‘죽기 살기로’ ‘박멸’ ‘하면 된다’ ‘빨리빨리’ 등 표현의 의미가 특별히 발달한 ‘한국적 생존경쟁’의 기원을 19세기 말, 20세기 초까지 거슬러올라 찾아나선다. 그 한복판에는 제국 열강에 낀 한국 민족주의와 조응하는 ‘힘의 숭배 사상’ 사회진화론의 모습이 놓여 있다. 전작 <당신들의 대한민국>(2001) <우리 역사 최전선>(2003) <나를 배반한 역사>(2003) <하얀 가면의 제국>(2004) 등을 통해 한국 사회와 역사를 비판하고 분석해온 그에게, 일찌감치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와 사회진화론은 오래 품어온 연구 주제였다.

죽기살기로…빨리빨리…‘전투적’ 생활양식 기원 19세기말 ‘힘 숭배’사상서 찾아
구한말 개화파 · 민족주의자등 사상적 영향 다루기도
식민시대 우파 신지식인들 일본 지배 합리화 수단이용

사회진화론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에서 다윈의 생물진화론에 앞서 태어나 다윈주의의 발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인간사회에서 ‘힘’과 ‘경쟁’이 사회의 진화를 이끈다는 사상으로, 허버트 스펜서가 그 원조로 꼽히는 사회진화론은 개인은 물론 민족, 인종, 국가의 경쟁 원리가 되었으며, 대체로 개인의 자유 경쟁에 대한 국가 개입을 반대했다.


이런 사회진화론이 서구 근대화의 동력이었을 뿐 아니라, 구한말과 식민 시대에 한국 개화파와 민족주의 지식인들한테도 ‘감화’를 준 사상이었다는 점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이 책은 1880~1920년대를 배경으로 유길준·윤치호·서재필·신채호·박은식·이승만·한용운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논객들과 <독립신문> <황성신문> 등 언론에 스며든 사회진화론의 모습, 신채호·한용운 등 일부의 그 사상적 극복 과정, 그리고 아시아적 사회진화론과 강권(强權)주의를 제창한 량치차오(양계초)가 개화 신지식인에 끼친 지대한 영향들을 다루고 있다.

1900년대 신지식인들한테 그것은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약육강식이 곧 우주와 사회의 도리”이며 “적자생존은 우주 불변의 법칙”이라는 등식으로 집약되는 사회진화론은 유교의 성리설을 대체하는 진리로 받아들여져, ‘부적자는 스스로 도태돼야 한다’ ‘백인종에 맞선 황인종의 대동단결’은 국가 민족주의, 힘의 이데올로기, 아시아주의의 토대로 자리잡았다. 특히 ‘힘의 숭배’는 우파 신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종종 강한 자인 서구와 일본에 대한 예찬과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다. “우리는 생명을 가진 지라…생존욕이라는 것을 가졌으며…나는 국가라는 것의 성립이 옳은지 그른지는 몰라…그러나 그것이 나의 생존에 밀접한 관계 있는 것을 깨달았노라”고 고백한 이광수는 강한 대일본제국의 애국자를 자처한다.

박 교수는 사회진화론이 전근대의 절대 우상에서 깨어나는 근대화의 순기능도 지녔다고 평가하면서도, ‘강자’인 서구·일본 제국과 달리 ‘약자’인 한국에서는 힘의 맹목적 숭배와 합리화, 개인 인권에 앞선 국가·민족주의의 발달 등 역기능을 일으켰다고 비판한다. 그런 점에서 해방 이후 이어진 박정희 정권의 반공 안보가 만든 ‘레드 콤플렉스’, 스포츠 애국주의, 수출의 종교화, 승자 독식 사회, 국가 경쟁력 주의 등은 식민적 사회진화론의 계보에 포섭돼 있다.

“인생을 ‘생존경쟁’으로 개념화하는 오늘날의 한국인은, 식민지에서 벗어났어도 거시적 의미의 ‘식민성’을 벗어버리지 못한, …늘 압도당해온 세계체제 주변부라는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현실 속에서 태어난 셈이다.” 생존경쟁이라는 우리 사회의 중심가치는 언제쯤 ‘힘’을 빼고 중심의 자리에서 물러날까, 역사학자인 그가 과거에서 돌아와 오늘에 묻는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