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가득 찬 흙집 방. 한 사람 누우면 딱 맞는 방이어서 권정생은 손님 맞는 것도 어려워했다.(오른쪽) 아동문학가 이오덕(왼쪽)과 권정생. 열두 살 위였던 이오덕은 권정생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존대했고, 권정생의 글을 세상에 알리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73년 처음 만나 30년 동안 두 사람은 변함없는 벗으로 지냈다.(왼쪽)
‘권정생 타계 1주기’ 첫 산문집·유작·전기 등 나란히
굶주리고 병든 삶 껴안고 글로 더 아픈 것들 다독여
굶주리고 병든 삶 껴안고 글로 더 아픈 것들 다독여
〈권정생의 삶과 문학〉원종찬 엮음/창비·2만원
〈권정생-동화나라에 사는 종지기 아저씨〉이원준 지음/작은씨앗·1만원
〈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 산문집〉권정생 지음/녹색평론사·1만원
〈랑랑별 때때롱-권정생 장편 동화〉권정생 글·정승희 그림/보리·1만2000원
이름 그대로 ‘정생’(正生)이었다. ‘바른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름값을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바른 삶’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고쳐 부를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아득한 높이에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알고 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라면 너무 어려워 도저히 사람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특히 나와 같은 인간은 생전에 아무도 사랑해보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단호한 겸손 때문에 그는 ‘사랑이라는 진리에 가장 가까이 간 정신’이었다. 오는 17일은 바로 그 정신이 하늘로 간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 타계 1주기에 즈음해 그를 기리는 책들이 한꺼번에 나왔다. 아동문학 평론가 원종찬 인하대 교수가 엮은 <권정생의 삶과 문학>은 ‘기림’의 뜻에 가장 충실한 책이다. 고인을 추억하는 시들을 앞세운 이 책은 권정생 연구를 위해 참고가 될 만한 평론과 회고글들을 가려 뽑았다. 그런가 하면 <권정생-동화나라에 사는 종지기 아저씨>는 어린이들이 읽기 좋게 쓴 전기다. 가난과 고난의 참담한 생애를 보낸 뒤 아름다운 작품만 남기고 병고의 몸을 벗어버리기까지 70년 삶이 단출하게 담겼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1996년에 나왔던 고인의 첫 산문집에 그 뒤 쓴 두 편의 글을 보태 펴낸 개정증보판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이제 우리는 더는 저 조탑리의 작고 어두운 골방으로부터 나오는 유례없이 부드럽고 간곡한, 그러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무서운 목소리를 듣는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며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려 이 증보판을 낸다고 책머리에 밝혔다. <랑랑별 때때롱>은 타계하기 넉 달 전에 연재를 마친 고인의 유작이다. <강아지 똥>에서부터 <몽실 언니>를 거쳐 40년 동안 이어진 권정생의 문학적 삶의 마침표에 해당하는 작품인 셈이다. 과학문명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생명에 대한 사랑임을 거듭 일깨우는 동화다.
권정생의 일생은 20세기의 모든 고통이 한데 집결한 것과도 같은 일생이었다. 부모는 먹고살려고 식민지를 떠나 제국의 수도 도쿄에서 밑바닥 삶을 살았다. 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재일 조선인 2세가 어린 권정생에게 할당된 첫 번째 삶이었다. 1946년 귀국선을 타고 아버지의 고향 경북 안동으로 돌아왔으나, 해방된 조국이 안겨준 건 헐벗음과 굶주림뿐이었다. 하루 세끼 끼니를 때울 수 없었던 가족은 말 그대로 먹을 것을 찾아 안개처럼 이리저리 흘러다녔다. 한국전쟁 중에 가까스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권정생은 중학교에 갈 학비를 마련하려고 피란지 부산에서 점원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5년의 극빈 생활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늑막염에 폐결핵뿐이었다. 스무 살 청년의 생기를 파먹고 들어앉은 결핵은 평생토록 숙주의 몸을 떠나지 않고 창궐했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가난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집은 결핵 환자에게 힘이 되기는커녕 남은 기운마저 빼앗았다. 슬픔과 눈물이 꼬막만한 오두막을 넘쳐 흘렀다. 결핵균이 폐를 뚫고 신장과 방광까지 덮쳤다. 병에 곯은 청년에게 유일한 위안은 교회에서 듣는 말씀이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고통의 나날 속에 살아 있는 주검 같은 몸을 지탱해준 것이 교회였다. 64년, 겪은 것이라곤 오직 굶주림과 막노동뿐이었던 어머니가 68년의 삶을 등졌다. 동생이라도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병든 형이 지키고 있으면 누가 시집오겠느냐는 아버지의 한숨에 권정생은 이듬해 집을 떠났다. 석 달 동안 풍찬노숙보다도 못한 유랑걸식을 했다. 밥을 빌어먹고 거적때기를 덮고 자는 병자-거지에게 그 석 달은 “가장 혹독한 밑바닥 생활”이었다. 그러나 정신은 여기서 더 푸르게 살아났으니, 그는 뒷날 이때를 돌이켜보며 “일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인생 체험”이었다고 썼다. “예수님의 40일간 금식 기도만큼 나에게 산 교훈을 일깨워준 기간이기도 했다.”(권정생,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아픈 몸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가 몸져누웠다. 그해 겨울 아버지마저 영영 어머니 곁으로 떠났다. 결핵균이 홀로 남은 그 몸에 결정적 일격을 가했다. 신장 하나를 잘라내고 방광을 드러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남은 목숨이 2년이라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2년이 지나고도 살아남았다. 죽음의 두려움을 잊으려고 몰두하기 시작한 것이 책 읽기와 글쓰기였다. 그 무렵 그는 이웃 일직교회 문간방에 종지기로 들어갔다. 새벽마다 종을 치고, 힘이 남으면 글을 썼다. 1969년 그의 첫 작품 <강아지 똥>이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현상공모에 뽑혔다. 모두들 더럽다고 피하는 강아지 똥이 스스로 거름이 되어 민들레꽃을 피운다는 내용은 권정생 자신의 삶의 투영이었다. “‘돌이네 흰둥이가 누고 간 똥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짧은 동화는 한국 아동문학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선을 그어놓았다.”(이현주, ‘동화작가 권정생과 강아지똥’)
82년 권정생은 16년 동안 살았던 교회 문간방을 떠나 작은 흙집으로 이사했다. 아픈 몸에서 활활 타오르는 창작열도 함께 흙집으로 이사했다. 84년 불후의 명작 <몽실 언니>가 태어났다. “절뚝거리며 걸을 때마다 몽실은 온몸이 기우뚱기우뚱했다. 그렇게 위태로운 걸음으로 몽실은 여태까지 걸어온 것이다. 불쌍한 동생들을 등에 업고 가파르고 메마른 고갯길을 넘고 또 넘어온 몽실이었다.”(권정생, <몽실 언니>) 다리를 절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동생을 돌보는 몽실 언니는 둘로 나뉘어 불구가 된, 그러나 희망을 놓을 수 없는 한반도의 은유였다. 어린 것들, 아픈 것들을 언제나 애틋한 마음으로 감싸안았던 권정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역사는 잔인하지만 생명은 아름답다.” 그의 작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 무소유라는 말이 외려 사치스러울 정도로 완전한 가난 속에 산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루치 생활비 외에 넘치게 쓰는 것은 모두 부당한 것입니다. 내 몫 이상을 쓰는 것은 벌써 남의 것을 빼앗는 행위니까요.” 그는 생전에 인세로 들어온 돈을 꼬박꼬박 모아 모두 뒷세대에게 돌려주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평생 모은 5000만원으로 옥수수를 사서 북한 어린이들에게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권정생의 삶과 문학〉〈권정생-동화나라에 사는 종지기 아저씨〉〈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 산문집〉〈랑랑별 때때롱-권정생 장편 동화〉
집으로 돌아왔으나, 가난의 냄새가 코를 찌르는 집은 결핵 환자에게 힘이 되기는커녕 남은 기운마저 빼앗았다. 슬픔과 눈물이 꼬막만한 오두막을 넘쳐 흘렀다. 결핵균이 폐를 뚫고 신장과 방광까지 덮쳤다. 병에 곯은 청년에게 유일한 위안은 교회에서 듣는 말씀이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고통의 나날 속에 살아 있는 주검 같은 몸을 지탱해준 것이 교회였다. 64년, 겪은 것이라곤 오직 굶주림과 막노동뿐이었던 어머니가 68년의 삶을 등졌다. 동생이라도 장가를 보내야 하는데 병든 형이 지키고 있으면 누가 시집오겠느냐는 아버지의 한숨에 권정생은 이듬해 집을 떠났다. 석 달 동안 풍찬노숙보다도 못한 유랑걸식을 했다. 밥을 빌어먹고 거적때기를 덮고 자는 병자-거지에게 그 석 달은 “가장 혹독한 밑바닥 생활”이었다. 그러나 정신은 여기서 더 푸르게 살아났으니, 그는 뒷날 이때를 돌이켜보며 “일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인생 체험”이었다고 썼다. “예수님의 40일간 금식 기도만큼 나에게 산 교훈을 일깨워준 기간이기도 했다.”(권정생,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흙집 마당에 빨래를 너는 생전의 권정생. 그는 전신결핵을 안고 평생 혼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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