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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모자로 변한 아버지 ‘미학적 승화’

등록 2008-07-04 19:32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지음/문학동네·1만원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예작가 황정은씨가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를 묶어 냈다.

황정은씨의 소설은 사실주의적 기율의 무중력 상태에서 빚어진다. 개연성과 인과관계 같은 사실주의 소설의 규약들은 여기서 예사로 무시된다. “m의 등뒤에는 남이 볼 수 없는 문이 하나 있었다”는 <문>의 첫 문장, 그리고 “세 남매의 아버지는 자주 모자가 되었다”는 <모자>의 첫 문장은 이 작품들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을 상정하고 출발하는 것임을 시작부터 공표하는 셈이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하반신이 마비되어 침대 신세를 지고 있는 인물이 종종 모기 속으로 가라앉는다거나(<모기씨>), 고양이를 닮았으나 사람의 말을 하며 화가 나면 몸이 여럿으로 불어나는 기이한 애완동물이 등장하는(<곡도와 살고 있다>) 등 현실적이지 않은 설정이 자주 활용된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자>에서 아버지가 모자로 변신하는 상황을 검토해 보자. 친구들과 같이 길을 가다가 추레한 입성의 실업자 아버지와 마주치자 부끄러워서 모르는 척했더니 아버지가 모자로 변했다는 것이 첫째의 기억이다. 어머니는 병중이고 집안 형편은 어려운 상황에서 고장난 라디오 때문에 아버지에게 대들었더니 아버지가 모자로 변했다는 것이 둘째의 기억이고, 학부모 참관일에 학교에 온 아버지가 모자가 되어 사물함 위에 얹혀 있더라는 것이 셋째의 기억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 모자가 된 아버지란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체면에 심각한 손상이 초래되었음의 은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등 뒤의 문 역시 가까운 이의 죽음이나 회복 불능의 손실 같은 절망적 사태의 표지로 이해할 수 있다. 황정은씨의 소설은 이렇듯 아픈 현실을 살짝 비틂으로써 미학적 승화와 개성의 확보에 성공한다.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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