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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분단…어머니… 자책의 절창

등록 2005-04-29 17:41수정 2005-04-29 17:41

김규동 시집 ‘느릅나무에게’

죽지 전에 못 가면/

죽어서 날아가마/

나무야

원로 시인 김규동(80)씨가 14년 만의 신작 시집 <느릅나무에게>(창비)를 내놓았다.

“닭이나 먹는 옥수수를/어머니/남쪽 우리들이 보냅니다/아들의 불효를 용서하셨듯이/어머니/형제의 우둔함을 용서하세요”(<어머니는 다 용서하신다> 전문)


시집의 맨 앞에 배치된 이 짧은 시는 월남한 시인 자신의 처지에 분단 현실의 비극성을 포개 놓은 수작이다. 지금껏 살아 있기 어려울 북녘의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사료 수준의 조악한 식량을 동포에게 보내는 현실의 일그러진 단면이 어우러져 이 시는 시집을 펴서 읽는 독자에게 벽력같은 충격을 준다.

노 시인에게 필생의 한으로 자리 잡은 분단의 아픔이 주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회한의 정서를 수반하는 것은 이 시집의 특징적인 양상이다.

“북녘/내 어머니시여/놀다 놀다/세월 다 보낸 이 아들을/백두산 물푸레나무 매질로/반쯤 죽여주소서 죽여주옵소서.”(<죽여주옵소서>)

“너를 보게 될까 하여/오래도록 기다렸다/(…)/얘야, 38선 없애버리고 빨리 오너라.”(<저승에서 온 어머님 편지>)

어머니의 재촉은 아들의 죄책감과 짝을 이룬다. 뒤의 시에서 ‘어머니’가 하나 된 민족이라는 당위를 대표한다면, 앞의 시에서 불충한 ‘아들’은 갈라진 민족 현실을 대리한다. 뺀질뺀질 게으른 현실이 추상같은 당위 앞에 종아리를 걷고 매를 기다리는 형국이다. “반쯤 죽여주소서”에서 드러나는 감정의 격렬함은 “규천아, 나다 형이다”(<천(天)> 전문)라는 한 줄짜리 절규로 이어진다. “죽기 전에 못 가면/죽어서 날아가마/나무야”(<느릅나무에게>)의 나무는 필시 어머니와 동생을 대신하는 사물일 터이다.

노시인의 필생의 한 통일을 향한 비원 호소력있게 노래

분단 현실에 대한 죄책감과 통일을 향한 비원을 단정하면서도 호소력 있게 노래한 절창이 <아, 통일>이다.

“이 손/더러우면/그 아침/못 맞으리//내 넋/흐리우면/그 하늘/쳐다 못 보리//반백년 고행길 걸은/형제의 마디 굵은 손/잡지 못하리/이 손 더러우면//내 넋 흐리우면/아, 그것은/영원한 죽음.”(<아, 통일> 전문)

노 시인의 시집에서 또 한가지 눈에 띄는 특징은 김수영과 박인환, 오장환, 김기림 같은 문학사적 존재들에 대한 생생한 회고담이다. 1948년 정월에 단신 월남한 시인은 그 해 여름 소공동 ‘플라워다방’에 들른다. 남쪽 문인들을 대면하고자 해서였다. “안쪽 구석 테이블에서/한창 원고를 갈기고 있는/베토벤 같이 헝클어진 머리를 한” 소설가 김광주, 초년의 문학청년에게 비교적 친절했던 김동리, “내과의사 같은 인상을 한/깡마른 조연현”, “검은 안경테가 유난히 굵어 보이는” 조지훈 등을 그곳에서 만났다. <플라워다방>에 나오는 내용이다.

<탁자>라는 제목의 시는 1950년대에 ‘후반기동인’을 함께 했던 박인환의 생전 면모를 되살린 작품이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와 빈 탁자에 앉아서는 깨끗하게 청서한 자신의 작품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를 묵독한 뒤, 시인을 향해 “자네는 폐야, 폐병” “자넨 가난뱅이라/인삼 녹용 못 쓸 게고/일광욕밖에 없어, 일광욕”이라 충고하던 박인환은 오히려 제가 먼저 서른 살 꽃다운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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