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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한글 자음 순서따라 의문의 살인사건

등록 2008-10-17 20:07수정 2008-10-17 20:08

‘편지 문학 전도사’ 김다은씨가 조선 세종대를 배경으로 한 편지 형식의 추리 소설 <훈민정음의 비밀>을 내놓았다. 생각의나무 제공
‘편지 문학 전도사’ 김다은씨가 조선 세종대를 배경으로 한 편지 형식의 추리 소설 <훈민정음의 비밀>을 내놓았다. 생각의나무 제공
세종 평등정책 맞선 기득권층 싸움 그려
세자빈 봉씨 등 실존+허구 ‘한국적 팩션’
〈훈민정음의 비밀〉
김다은 지음/생각의나무·1만1000원

소설가 김다은(추계예대 문창과 교수)씨는 문단에서 ‘편지 문학의 전도사’로 알려져 있다. ‘편지 쓰는 작가들의 모임’을 결성해 매달 독자를 초대해 편지 낭독회를 여는 한편, 문인들의 편지를 모아서 <작가들의 연애편지>와 <작가들의 우정편지>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2년 반 전에는 프랑스의 한 고성에서 열린 편지 축제의 와중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 <이상한 연애편지>를 낸 적도 있다.

그가 새롭게 발표한 소설 <훈민정음의 비밀>은 훈민정음 반포 직후인 조선 세종대의 궁궐을 무대로 한 추리소설이다. 관례식을 앞두고 발견된 어린 궁녀의 주검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보낸 79통의 편지를 통해 전개된다. 실존인물과 허구적 인물이 뒤섞였다는 점에서 ‘한국적 팩션’을 향한 새로운 시도라 할 수도 있겠다.

“음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배웠노라. 하지만 자선당에는 양은 없고 음만이 있었노라. 여자들만 항상 있었노라. 자선당뿐만 아니라 나인들의 처소에는 여자들만 있었노라. 남성의 소리는 없고 여성의 소리만 있었노라. 결국 여자의 소리가 남자의 소리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노라.”(92쪽)


〈훈민정음의 비밀〉
〈훈민정음의 비밀〉
“한문이 남자의 글이고 학문의 글이라면, 언문은 천민들의 글이고 여자의 글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상 전하께서는 천민과 여자의 글을 관원을 뽑는 데 사용하게 하시고, 심지어 문과 시험의 책문으로 물으셨으니, 언문에 들어 있던 천하고 음습한 기운이 학자들의 양기를 내리누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196쪽)

앞의 인용문은 어린 궁녀의 주검 곁에서 발견된 ‘세자빈 봉씨의 편지’다. 세자빈 봉씨는 나중에 문종이 될 세자의 두 번째 부인이자 세종의 며느리이지만, 궁녀와의 ‘추한 일’로 폐빈이 되고 이어 사망한 인물이다. 세종실록에도 나오는 ‘추한 일’이란 동성애를 가리키거니와, 이미 죽어 없어진 폐빈의 입을 빌려 토로되는 것은 남녀 사이의 음양의 이치에서 소외된 궁궐 여인들의 한이다. 세자빈 봉씨의 폐위와 죽음 이후에도 궐 안의 여성들 처지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무망하며 ‘추한 일’ 역시 끈질기게 맥을 이어 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폐빈 봉씨의 편지를 내리누르고자 부르짖는 듯한 뒤의 편지는 성균관 유생들이 임금에게 보낸 것이다. 훈민정음을 반포한 세종이 문과 시험마저 한문이 아닌 언문으로 출제하고 그 뒤 장원을 차지한 중인 출신 이개를 필두로 급제자들이 차례로 죽어 나가자, 훈민정음이 천지와 음양의 조화를 깨뜨렸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취지로 상소를 올린 것이다.


궐 안 궁녀의 죽음과 궐 밖에서 벌어진 일련의 의문사는 처음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소설 말미로 가면서 하나의 지점을 향해 수렴된다.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에 깃든 계급 및 남녀 평등 사상과 그에 맞서는 기득권층의 싸움이 소설의 축을 이루는 것이다.


집현전 학사도(왼쪽)와 <훈민정음> 언해본 본문(오른쪽 위), 그리고 훈민정음 반포도 일부(오른쪽 아래). 생각의나무 제공
집현전 학사도(왼쪽)와 <훈민정음> 언해본 본문(오른쪽 위), 그리고 훈민정음 반포도 일부(오른쪽 아래). 생각의나무 제공
이개를 필두로 한 의문사의 희생자들 이름이 훈민정음 자음의 최초 순서와 일치한다는 점은 소설의 흥미를 더한다. ‘장원 이개(ㄱ), 김큰순(이개의 어미, ㅋ), 2위 김남현(ㄴ), 14위 강덕수(ㄷ), 32위 김태(ㅌ)…’식으로 이어지는 희생자 이름의 자음 순서는 지금의 순서와는 다르다. 작가는 “애초의 한글 자음은 발성기관을 본떠서 만든 다섯 가지 기본음 ㄱ, ㄴ, ㅁ, ㅅ, ㅇ에 소리가 거세질수록 한 획씩을 더하는 순서였다”고 주장했다. ㄱ→ㅋ, ㄴ→ㄷ→ㅌ, ㅁ→ㅂ→ㅍ, ㅅ→ㅈ→ㅊ, ㅇ→ㆆ→ㅎ에다 ㆁ, ㄹ, ㅿ이 이어지는 이 최초의 순서는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 처음 왜곡된 데 이어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지금의 순서로 굳어졌다. 작가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자모를 되찾는 일이 매우 시급하다”며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 백성에게 가졌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소설을 썼다”고 밝혔다. 작가는 “세조의 후궁이 환관에게 연애편지를 썼다가 무수리로 강등당한 뒤 결국에는 처형당한 사건을 소재로 또 한 편의 편지 소설을 준비 중”이라고 덧붙였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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