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알았던 사람〉
■ ‘인공지능 선구자’ 튜링의 비극적 삶
〈너무 많이 알았던 사람〉
앨런 매티슨 튜링(1912~1954). 방독면을 쓴 채 자전거를 타고 일터에 가던 수학자. 바퀴 회전수를 헤아려, 체인이 톱니를 벗어나기 전에 미리 알아차리고 자전거를 세웠던 사람. 완고하게 엄격했지만 수줍고 겸손했던 천재.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조국 영국을 구했지만, 훗날 동성애를 ‘추악한 외설’로 규정한 법률로 구속돼 ‘화학적 거세’를 당한 뒤 2년 만에 급사하고 만 인물. <너무 많이 알았던 사람>은 한 소설가가 추적한 ‘인공지능 선구자’의 비극적 일대기다. 1940년대에 현대 컴퓨터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튜링 만능기계’ 논증과 ‘기계도 생각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려 고안한 ‘튜링 테스트’가 창안되는 과정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논리적 모순이 실재하는 현실에 영향을 주는가라는 문제를 두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과 벌인 논쟁도 흥미롭다. 청산가리에 담근 사과를 베어 물고 숨지기 두 해 전, 그는 자신의 삶이 한동안 유폐되고 오해받을 것을 예견하는 삼단논법을 편지로 남겼다. “튜링은 기계가 생각한다고 믿는다. 튜링은 남자와 동침한다. 그러므로 기계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가 숨진 지 10년 뒤, 역시 동성애자였던 ‘광기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남자끼리의 결혼이 인정되지 않는 한 진정한 문명은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류는 지성의 필수적 요소”라는 믿음을 평생 버리지 않았던 튜링, 그 또한 ‘문명의 야만’에 휩쓸려 속절없이 쓰러졌던 것이다. 데이비드 리비트 지음·고중숙 옮김/승산·1만8000원.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 위기의 한국경제 탈출구는 어디에
〈신자유주의 이후의 한국경제〉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신자유주의의 천국 미국에서 자동차업체 대표들이 국가의 개입을 간청하는 꼴이라니. 상품 내재가치의 수십 배 이상 거품을 만들어내는 파생상품을 책상머리에서 뚝딱뚝딱 만들어내던 월가의 몰락은 신자유주의의 몰락도 함께 불러왔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아직도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아직도 투자은행(IB)을 말하고 민영화 타령을 한다. 문제는 이 정부가 52 품목의 물가를 인위적으로 규제하고 민영화된 옛 공기업의 사장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1970년대식 행태도 함께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자기들 편할 대로 신자유주의와 국가 통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중이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누리꾼들의 ‘경제 대통령’ 미네르바는 대출을 털고 현금을 챙기고 생필품을 사재기해 ‘각자도생’하라고 충고한다. 과연 그게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대안 정책 수립을 목표로 2006년 2월 설립한 민간 두뇌집단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은 이번 위기가 대기업과 은행에서 시작한 1997년 외환위기와 달리 한국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자영업·중소기업에서 시작해 위로 번져가는 아래에서부터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아이엠에프 구제금융기보다 더 혹독한 상황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유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다수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할 노력이라고 강조한다. 그 해법은 현재의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아예 넘어서는 새 시스템을 고민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지음/시대의창·1만5000원.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
■ 한국현대사 ‘객관적’ 평가는 가능한가
〈좌우파가 논쟁하는 대한민국사 62〉
‘왜 우리는 같은 역사를 보고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것일까?’ 김영명 한림대 교수가 쓴 <좌우파가 논쟁하는 대한민국사 62>는 이 물음에서 시작한다. 지은이는 보수와 진보 양쪽 모두 주관적이고 편향되어 있다고 말한다. 한국 근현대 교과서 수정을 둘러싸고 뜨겁게 벌어졌던 논란이 그 사례다. 특히 “잃어버린 10년”이 보수파에게 위기감을 던졌고, 대응으로 보수세력들이 새로운 역사인식을 들고 나와 쟁점들이 첨예해졌다는 것이다.
일제 통치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한쪽에서는 수탈만 강조하고, 다른 쪽에서는 성장만 강조한다. 외눈박이 역사관이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성장이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지만, 역시 수탈을 위한 것이었다. ‘수탈 성장론’이다. 지은이는 묻는다. 객관적인 역사는 있는가? 6·25 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이승만은 나라의 아버지인가, 독재자일 뿐인가? 박정희는 민족의 구세주인가, 인권탄압의 독재자인가? 미국은 우리에게 구세주인가, 억압자인가? 하나의 정답은 없다. 역사는 어차피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에, 객관적인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지은이에게 역사에 대한 자기비하와 자화자찬 모두 열등감의 산물이다. 두 극단의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인식과 사회발전의 첫걸음이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는 한국 현대사 62가지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좌파에게도 욕먹고 우파에게도 욕먹는” 데는 희망대로 성공한 듯하다. /위즈덤하우스·1만3000원.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 불안서 벗어나려 한 ‘르네상스 욕망’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14~16세기 유럽을 풍미했던 ‘르네상스’(재생·부활)는 서양사의 거대한 분기점이었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찬란한 영화를 되살리려 했던 전방위적 흐름은 신이 다스리던 중세에 인문의 지위를 복권시키면서 ‘근대’의 지평을 열어젖힌 계기가 됐다. 역사학자들은 대개 새로운 세계의 탄생에는 주목하지만 끝난 시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일반적으로 종결은 항상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은 문자 그대로 르네상스의 종말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책이다.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인 지은이는 한 시대의 종결기를 살펴보는 것이 그 시대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며, 시대를 하나로 통합해 주는 요소들과 그 결속력을 파괴하는 새로운 변화의 원동력을 밝혀낼 수 있다고 믿는다. 지은이는 예술양식의 급변, 훗날 ‘앙시앙레짐’이라고 이름 붙여질 권력 재편과 자본주의의 출현,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등 당대의 격랑을 추적한 뒤, 1700년을 전후한 ‘계몽의 프로젝트’에까지 이른다. ‘계몽’은 르네상스에서 배태됐으나 근대에 호적을 올렸다. 르네상스 말기의 특징은 “고대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 힘을 잃고, 세속적 중앙집권국가 체제가 확립됐으며, 과학과 이성이 최고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 것으로 정리된다. “이 모든 일은 혼란과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당대 사람들의 강렬한 열망”에서 비롯했고, 그 결과 더는 르네상스라고 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았다. 시어도어 래브 지음, 강유원·정지인 옮김/르네상스·1만2000원.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 지식과 기억의 오류성에 대한 탐구
〈지식, 철학의 법정에 서다〉
엑스레이가 발견되고 얼마 안 돼 프랑스 물리학자 르네 블론로가 또다른 광선, ‘엔(N)레이’의 발견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이 광선은 불빛의 세기를 증가시키는 신비의 광선으로 소개됐다. 엔레이는 여러 차례 다른 실험에서도 재현됐다. 그러나 프랑스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는 같은 실험 결과가 나오지 않아 논란이 됐다. 결국 엔레이는 프랑스 과학자들의 기대심리가 낳은 착각으로 밝혀졌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말의 실례였던 셈이다.
<지식, 철학의 법정에 서다>는 인간의 지적 활동이 오류와 거짓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지적 활동은 그 기초가 되는 단순 경험과 지각, 기억에서부터 혼란과 오류투성이다. 지각을 해석하고 기억을 재생하는 뇌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같은 일을 경험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진술을 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1차 지각 자료를 되새김질하는 ‘생각’도 완전한 것이 아니다. 온갖 무의식과 선입견, 고정관념에 휩쓸리는 일이 다반사다. 이런 개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조직된 지식공동체는 믿을 만할까? 글쓴이 마이클 필립스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는 오늘날 과학의 한계와 과학자 개인의 이해관계 등으로 진실이 일그러진 사례가 적지 않다고 폭로한다. 철학의 범주로 보면 인식론에 관한 책이다. 글쓴이는 미국과 캐나다 대학에서 30년 넘게 철학을 강의했다. 그러나 딱딱할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실험 사례들이 소개돼 있어 쉽게 읽힌다. 홍선영 옮김/갤리온·1만4000원. 박병수 기자 suh@hani.co.kr
■ 한국과 일본 ‘멸시와 불신의 뿌리’
〈일본인의 조선관, 조선인의 일본관〉
8세기 일본 고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진구황후의 삼한정벌’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물론 연대조차 맞지 않는 기록이라 신빙성은 없다. 하지만 <일본인의 조선관>과 <조선인의 일본관>의 지은이는 진구황후 이야기가 일본인이 가진 한반도 인식의 뿌리깊은 속내라고 말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사적을 기록한 책 <무가사기>는 “조선이 본조의 속국임은 옛 진구황후가 삼한을 정복한 이래 명백하다”고 적었다. 조선통신사도 요즘 한-일 우호교류의 상징으로 부각되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이 점은 조선통신사에 대한 예우를 낮출 것을 주장해 관철했던 아라이 하쿠세키의 인식에서 구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아라이는 ‘조선은 군사력으로는 일본에 미치지 않기 때문에, 문화적 우위를 내세운다’며 반감을 드러냈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이들 상당수는 일본이 뻗어나가기 위해서 먼저 조선을 삼켜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했다. 조선인은 교활하며 독립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일본인의 한반도관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멸시’다. 가끔 터져나오는 일본 고위 정치인 망언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그렇다면 조선인의 일본관은 무엇일까. ‘불신’이 아닐까. 일본은 청일전쟁 때는 ‘조선의 독립’, 러일 전쟁 때는 ‘극동의 평화’, 태평양전쟁에 이르러서는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수사를 사용해 상대를 속여 왔다. 지은이는 일본의 총련계 조선대 교수를 지냈고,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진상규명 등에 애썼으며 최근 세상을 떠났다. 금병동 지음·최혜주 옮김/논형·각 권 1만6000원.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신자유주의 이후의 한국경제〉
■ 한국현대사 ‘객관적’ 평가는 가능한가
〈좌우파가 논쟁하는 대한민국사 62〉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지식, 철학의 법정에 서다〉
〈일본인의 조선관, 조선인의 일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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