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그리고 가을-나의 1951년〉
문학평론가 유종호 자전적 에세이
〈그 겨울 그리고 가을-나의 1951년〉
유종호 지음/현대문학·1만5000원 “기억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116쪽) 역사의 광풍 앞에 선 한 개인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 특히 극단적 선택과 비루한 생존만을 강요하는 전쟁과 반동의 시대엔 더욱 그럴 것이다. 지은이의 말대로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많이 상처받았다는 것이고 많이 아팠다는 것”이며, “기억은 상처받은 자존심이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내적 독백”일지도 모른다. 한국 문단의 1세대 평론가 유종호(73)씨가 10대에 겪은 한국전쟁 시기, 1951년의 모습을 담아낸 자전적 에세이 <그 겨울 그리고 가을-나의 1951년>을 펴냈다. 1941년에서 1949년까지의 유년 시절을 담은 <나의 해방전후>에 이은 두 번째 회상기다. 신산스런 한국전쟁기의 시대적 풍경을 17살 소년의 눈으로 재현했다. 지난 1년 동안 문학잡지 <현대문학>에 연재한 것을 묶은 것이기도 하다. 한 편의 성장소설이나 재미있는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처럼 흥미롭다. ‘북풍 한설의 찬 바람에’ 부친과 일곱 살의 막내아우까지 6인 가족이 떠난 피란길, 미군 해병대의 문지기와 서기 생활을 하며 겪은 ‘최초의 사회경험담’이 기억의 저장고에서 뛰쳐나온다. 지금은 고인이거나 여든을 넘긴 노인이 됐을 인물들이 전쟁기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으로 되살아나 ‘4월의 올드랭사인’, ‘밥집의 공포’ 등 각각의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기록해 둔 메모 하나 없이 노년의 기억에만 의존해 썼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다 사실일까’라는 턱없는 의심이 생길 정도다. 하지만 ‘청주 소재 미해병대 책임자 파슨 준위, 부산 출신의 부대 통역 미스터 손, 청주 이중복씨 집의 뜨개질 소녀 이연호’ 등은 모두 실재인물이고, 몇몇을 빼고는 거의 실명 그대로라는 게 지은이의 말이다. 인물들의 부정적인 일면까지 가감없이 담고 있다. 책을 쓴 이유를 두고 지은이는 책머리에서 “그 시대의 모서리를 직접 경험이 없는 세대에게 알리자는 취지에서였다”고 말한다. “근접 과거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이해가 너무나 허술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 아우슈비츠 어느 건물 입구에 적혀 있다는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마련이다’란 말을 인용하며 글쓴 의도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런 만큼 책 곳곳에는 분단시대의 비극적 사건과 실상들이 곳곳에 배어 나온다. 보도연맹 사건의 일면을 보여주는, 남자들이 몰살해 두 집 건너 과부가 사는 과붓집 마을, 아들은 대한민국 군경에, 사위는 인공 때 부역세력에 의해 죽음을 맞는 등 몇달 사이에 아들과 사위, 며느리까지 잃은 백부 이야기, 피란길 행차에 국도변 마을 어귀마다 붙은 ‘이 마을엔 돌림병이 돌고 있습니다’란 벽보 등은 분단시대를 겪지 않은 후세대들이 새겨야 할 ‘역사’인 것이다. 지은이는 소설이 아닌 회상 에세이란 형식을 빌린 데는 “나만이 전달할 수 있는 진실이 있고, 그것을 허구로 번역하는 것이 진실의 순도를 훼손할지 모른다는 심정도 작용했다”고 말한다. 마지막 장 ‘세월이 간 뒤’에서 몇몇 등장인물들의 후일담까지 붙여 읽는이의 궁금증도 풀어 주었다. 이창곤 기자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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