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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소설 ‘빨래터’가 본 박수근과 위작논란

등록 2009-02-26 17:51수정 2009-02-26 19:11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국내 경매 사상 최고액을 기록했으나 곧이어 불거진 위작 논란으로 세상을 두 번 놀라게 한 박수근의 그림 <빨래터>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왔다. 중견 작가 이경자씨의 <빨래터>(문이당)가 그것이다. 소설 <빨래터>는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이 <빨래터>가 위작임을 주장하는 잡지 기사에 관한 소식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성남은 곧이어 <빨래터>의 소장자였던 존 릭스를 찾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소설은 켄터키에 가서 존 릭스를 만난 성남이 그로부터 <빨래터>를 소장하게 된 경위 설명을 듣는 장면을 말미에 배치한다. 소설 내적 논리로 보자면 “두텁고 거대한 의혹의 먹구름을 뚫고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성남의 다짐은 일단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소설 <빨래터>가 그림의 위작 시비에 대한 개입과 판단을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평생, 가족이 굶는지 먹는지도 모른 채 그림만 그리다가 개인전 한 번 열지 못하고 떠난 박수근”의 인간적인 면모를 되살리고, 어려서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미워했으나 아버지의 그림들을 베껴 그리면서 대를 이어 화가가 된 아들 성남의 부친에 대한 애증의 드라마를 엮어 가는 데 더 치중한다.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가슴 졸이며 억눌려 지내도 아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가난뿐이었다.”

어린 성남에게 박수근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무능한 가장의 모습으로 각인된다.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고 자기만의 빛과 형태를 찾아 몸부림쳤던 화가 박수근의 예술적 모색은 어린 아들의 이해 너머의 것이었다. 무능한 아버지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며 아이들에게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도록 단속한 어머니의 처사 역시 그에게는 이해 불가능한 어떤 것이었다. 얼른 커서 공고라도 졸업하고 기술자가 되어 어머니와 식구들을 배불리 먹이겠노라는 것이 어린 성남의 간절한 꿈이었다.

아들의 이해 너머에서, 그러나 아내의 존경 어린 보살핌 속에서, 박수근의 그림은 진화한다. 분홍과 검정과 흰빛과 회색이 섞인 돌덩어리를 들여다보고 귀에 대 보기도 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그림에 대한 실마리를 잡아내는 박수근의 모습을 보라.

“시간이 다 살아 있어. 살아 있는 시간들이 여기 들어 있다니깐. 시간이 살아 있다면 생명도 있는 거야. 살아 있는 생명들이. 느껴 봐, 여보.”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박수근 특유의 색감과 질감이 탄생하는 장면이 아니겠는가. 그런가 하면 그의 그림의 소재가 된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에 대한 그의 애정 역시 새겨들을 만하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그러니, 소설 말미에서 성남이 존 릭스를 만나 확인한 것은 <빨래터>가 진품이라는 사실보다는 ‘예술가 박수근’에 대한 이해와 존경이라 할 수 있겠다. 성남의 독백 형식을 취한 다음 구절에 소설의 주제가 오롯이 담겨 있다 하겠다.

“오래도록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아버지 곁을 맴돌며 아버지를 밀어내고 아버지를 미워하고 아버지와 겨루어 온 아들을 용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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