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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맛깔스런 고전 지성성찬으로 초대

등록 2005-05-19 16:20수정 2006-02-06 20:21

커버스토리

“대학에서 최근 교양과목으로 고전 읽기 강좌가 많이 생겨나고 있어요. 고전학 과정도 생기고요.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강사들도 예전에 다 읽지 못했던 책들도 있어 학기 직전에야 부랴부랴 읽는 일도 많습니다. 고전을 읽지 않는 우리 문화 탓도 있고 목록이 너무 비현실적인 탓도 있죠.”

대학에서 고전 강의를 하는 강사 ㄱ아무개(47)씨는 “까놓고 얘기하면 우리 사회가 ‘고전 100선’ ‘200선’이다 해서 고전 읽기를 강권하지만 실제 일부 전공자를 빼고 얼마나 읽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고전의 ‘허위의식’을 심각하게 느낀다는 그는 “이제 고전에 대해 솔직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읽지 않는 고전, 목록의 권위만이 널리 유통되는 고전. 그래서 ‘고전’ 하면 늘 앞에 따라 붙는 수식어가 있다. “읽어야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자, 읊어보자. 플라톤의 <국가론>, 홉스의 <리바이어던>, 공자의 <논어>, 셰익스피어의 <햄릿> 등등 익숙한 목록은 누구나 줄줄 외어도, 정작 고전을 두루 읽었다 하는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아니 어렵다. 책세상 김광식 주간은 “고전 자체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고전이 우리말로 읽기 어렵게 잘못 번역돼, 특히 우리나라에서 ‘고전은 난해하고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이 깊어졌다”고 지적했다.

“솔직히 고전은 그동안 ‘권위의 장식물’이었고 ‘허위의식’이었습니다. 읽어야 지성과 교양인이 되고, 그래서 웬만한 집 책장에선 사상전집이니 문학전집이니 흔히 볼 수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고전 읽기에 실패하고 있죠. 읽어야 하지만 읽지 못하니 무언가 자책감 같은 것만 늘고…아예 담 쌓게 되죠.” 고전을 둘러싼 독자들의 오래된 이중 심리는 보일듯 보이지 않게 잠복돼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이런 우리 사회에 새로운 고전 읽기의 바람이 부는 걸까.

요즘 서점가에 한 번 들러보자. <국가론>(플라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 <공산당선언>(마르크스·엥겔스), <순수이성비판>(칸트) 등 기존의 오역을 걸러내고 원문을 직접 다시 번역하거나, 고전을 친근한 현대어법으로 바꿔 봄소풍 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때로는 전량투하 식 전집을 버리고 몸집 작은 문고판으로 탈바꿈한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책 만드는 출판인들은 “논술의 영향 때문인지, 복고 경향 때문인지 반응은 꽤 있다”며 “고전 또는 고전을 다룬 기획물은 앞으로도 더 늘 것”이라고 내다봤다. 청소년·아동판 고전들도 속속 고전 출간의 행렬에 합류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를 지혜와 지성의 성찬으로 초대하는 ‘고전의 식탁’이 점점 풍요로워지고 있다. 메뉴가 다양해지니 입맛 돋운 독자의 목젖도 꿀꺽일 만하다. 기분 좋은 일이다.

가장 큰 탈바꿈은 ‘고전 아예 다시 쓰기’다. 고전의 지은이가 살았던 당대와, 오늘의 독자가 사는 현대의 어법이 버무려진 채, 고전의 식탁에 올려지는 일종의 ‘퓨전 요리’다.

“몇 해 전만 해도 누가 감히 고전을 다시 쓸 수 있다고 생각이나 했습니까. 학계에 그럴 만한 필자도 없었고…. 지금은 인터넷 덕분에 거드름 피는 권위를 흔들어대는 ‘댓글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읽을 수 없는 고전의 허위의식에 대한 저항도 커졌고요. 난해한 고전의 권위 추락이죠. 그 결과가 바로 고전을 지금 어법대로 독자가 읽을 수 있게 다시 쓰려는 글쓰기 문화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린비 출판사의 유재건 대표의 말이다.

이 출판사에서 그 첫째 권으로 다룬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고전문학가 고미숙씨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란 제목으로 다시 써냈다. 고리타분함은 온데간데없고 17세기 얘기에 서양철학자 들뢰즈의 생소한 담론까지 등장한다. 엄숙주의보다 ‘포복절도’가 관심사다. “호모 루덴스가 펼치는 개그의 향연­ 만약 <열하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나는 예고편의 컨셉을 이런 식으로 잡을 작정이다.…유머 없는 <열하일기>는 상상할 수조차 없으니.” 이런 식으로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서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 이야기된다.

국가론, 논어, 햄릿… 먼지만 쌓이는 책들
포복절도 현대풍 ‘퓨전’요리부터 고갱이만 골라모은 맛보기
오역 걸러낸 원문 재번역까지
독자의 입맛 유혹 통찰과 상상력의 샘물로

다른 쪽에선 무대의 주인공인 고전을 한국인 청중 앞에 불러내는 전문가의 솜씨있는 소갯말(해설)과 더불어 고전의 주요 장면들을 그대로 선뵈는 ‘고갱이 맛뵈기’ 편집도 뚜렷하게 눈에 띈다. 책세상은 <순수이성비판 서문>(칸트), <인간불평등 기원론>(루소), <논어>(공자) 등 고전을 전문가들의 소갯말과 함께 발췌 번역해 담은 ‘책세상 문고­고전의 세계’ 문고판을 내고 있다. 벌써 46권까지 나왔다. 여기엔 <공산당선언>(마르크스·엥겔스),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소리>(퐁티), <행성궤도론>(헤겔) 등 그대로 전수돼온 고전의 ‘유전 목록’에 신선한 이름들도 추가됐다. 김광식 주간은 “고전의 맛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고전을 통째로 읽으라고 던져주기보다 아예 그 입맛을 돋우는 발췌 형식을 기획하게 됐다” “새로운 목록 짜기를 시도 중이다”고 말했다.

‘이(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를 내는 살림 출판사도 ‘고전 맛뵈기’와 더불어, 왜 이 책이 ‘고전’이 될 수 있었는지를 해설하는 시대 배경과 인물 해설, 그리고 고전에 관한 책 이야기를 담고 있다. <리바이어던>(홉스)에서 이 책이 ‘악마의 책’으로 불리며 금서가 된 배경, <군주론>(마키아벨리)에선 마키아벨리즘과 다른 마이카벨리의 사상과 삶에 관한 이야기들이 고전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드러낸다. ‘서해클래식’ 시리즈를 내는 서해문집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단테의 <신곡>을 ‘2005년 한국인’이 읽을 수 있는 어법으로 엮어 옮기는 새로운 틀을 시도 중이다.

●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고전의 성찬에서 화려한 중심은 ‘정통 요리’다.

번역서를 번역하는 게 아니라, 고전의 원문을 직접 번역하는 시대를 우리 사회는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박종현(71) 전 교수는 정년퇴직 뒤에도 여전히 바쁘다. “정말 하고싶은 일이 따로 있지만 모두 접어두고 지금은 아침에 녹차 한 잔과 함께 시작하는 플라톤 고전 번역 일에 하루 종일 매달리고 있다”고 한다. 정년퇴직 이전인 15년 전부터 국내 몇몇 철학자들과 함께 시작한 일이다. ‘우리 사회도 이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고전 완역판을 지녀야 한다’며 야심찬 기획을 세운 이래, 지난 2000년 성균관대에서 퇴임한 이후 지금까지 고전 번역은 그의 하루 일과가 됐다.

국내 처음 그리스어 원문을 직접 우리말로 옮긴 <국가론> 완역판(1997년)과 뒤이어 <티마이오스> <네 대화편> <필레보스> 완역판을 우리 사회가 지닐 수 있게 된 건 모두 그의 노력 덕분이다. 최근엔 <국가론> 개정증보판을 8년만에 다시 다듬어 냈다. 박 전 교수는 “고전이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번역이 제대로 안 돼 도통 무슨 말인지조차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며 “고전을 정확하게 완역하는 일이야말로 한 사회의 지식체제를 바로 세우는 기초라는 사명감으로 이 일을 한다”고 말했다. 한 권 번역에 꼬박 3~4년이 걸린다.

문학 분야에서는 천병희(66) 전 교수가 그리스·로마 원전 번역에 수십년째 나서고 있다. 1976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번역한 이래 지금까지 40종의 그리스·로마 고전을 우리말로 옮긴 그는 “학술논문에도 인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문학 고전을 번역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학자들의 정확한 번역 시도와 함께, 출판사들도 고전의 재번역에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서광사·한길사·문지사·민음사 등 출판사들은 정확한 원문 재번역에 최근 들어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고전은 왜 여전히 중요한가. 여러 사람들이 이런 물음에 답한다.

고전은 ‘살아남은 책’이기 때문이라고 책 만드는 출판인들은 말한다. 상상력과 통찰력, 독창성에서 무수한 책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시대를 넘어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서출판 살림의 강심호 기획2팀장은 “고전 한 권을 제대로 읽으면 그 고전을 인용하거나 응용한 수십권, 수백권의 책을 한 번에 읽은 효과가 있다”며 “더 많은 정보를 갈구하는 인터넷시대에 고전 읽기는 오히려 더 많은 정보와 통찰력에서 훨씬 더 효율적인 정보와 상상력의 원천”이라고 고전 읽기를 권한다. 책세상 김광식 주간은 “고전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가치”라며 “토론의 기회가 늘고 있는 우리 시대에 고전은 주장의 근거를 세우는 중요한 기초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안광복 중동고 교사는 “모든 고전을 원문 모두 다 읽을 수도 없고 그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런 점에서 고전의 부분을 발췌해 펴내는 책들이나 풀어쓰는 책들도 고전을 좀더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징검다리’ 구실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가톨릭대 교육대학원 정옥년 교수(독서교육)는 “고전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라며 고전의 가치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독서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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