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책방 순례/영광서점
저녁 퇴근길에 간혹 들르던 장소를 휴일 낮에 찾아가면 헷갈린다. 밤에 지리를 알리는 발광체들이 낮에는 지형지물 구실을 잃기 때문이다. 또 퇴근길에서 보는 그곳의 위치가 유사 출근길에는 반대방향인 까닭도 있다. 지하철 6호선 망원역에서 가까운 영광서점(주인:박현호, 02-337-6064)은 가끔 방향을 헷갈리게 하는 곳이다.
전형적인 헌책방인 이곳 내부는 전혀 헷갈리거나 복잡하지 않다. 출입구가 둘이지만 오른쪽은 책방 주인용이고 손들은 왼쪽으로 드나든다. 내부는 굳이 품들여 설명할 것도 없는 한 일(一)자. 통로 좌우로 책들이 꽂혔고 거기서 넘친 책들은 책꽂이 앞쪽에 허벅지까지 고였다. 주인을 닮아 책을 숨길 곳도, 책들이 숨을 곳도 없다. 관심의 넓이와 머무는 시간에 따라 책이 눈에 띄거나 그렇지 않거나 할 뿐이다.
책의 드나듦은 눈높이 아래에서 빈번하다. 책꽂이가 높고 주인은 키가 썩 크지 않은데 사다리가 없으니 그럴 것이다. 책들은 빛바랜 정도로써 책꽂이에 꽂힌 기간을 말해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수록,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진한 색이다. 주인석 주변은 시간의 흔적이 없는 재고 새책들이나, 아예 시간이 비집기 힘든 고서 몇권이 있다.
손들의 마음이 급하면 눈길은 눈높이 아래로 가고 널널하면 목젖 스트레칭을 한다. 비라도 뿌리면 스트레칭이 한결 느긋하다.
“이런 책도 나왔구나!” “내가 시덥잖은 일에 몰두하는 동안 그들은 이런 일들을 했구나!” 각각 소리를 내던 세로 제목들은 모자이크가 되었다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커다란 거울로 변한다. 거울 속에는 또다른 ‘나’가 “당신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를 묻는다. 거울 밖의 ‘나’가 불쌍하면 “지난 일주일은 뭘 했는가?”로 질책을 조금 눅여준다.
<권력장>(곽존복 지음, 푸른숲, 1998), <위대한 장군들은 어떻게 승리했는가>(베빈 알렉산더 지음, 홍익출판사, 2000)가 도드라진다. 전자는 3천년 중국 정치사에서 뽑아낸 통치의 기술. 후자는 마오쩌둥·징기스칸·나폴레옹 등 영웅들이 전쟁에서 이긴 비결을 추적한다. 세상이 한권으로 얻는 기술이나 비결로 살아낼 만큼 녹록한지는 사람마다 다를 터.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정영목 옮김, 청미래, 2002). 심각한 제목의 이 소설은 청춘남녀가 눈과 배가 맞으면서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에 관한 총체적 사유다. 지난 주에는 <한자고음사전>(버나드 칼그렌, 아세아문화사 영인, 1975)이 눈에 띄었다. 책값은 눅은 편이다.
주인은 ‘다른 일’로 바빠 책탑을 쓰러뜨리지 않는 손의 행태에 무관심하다. 책값 치를 때 비로소 눈을 마주칠 수 있다. 눈치보지 않고 책구경하기 마춤하다. 단, 우산 따위를 들고 가지 말 것. 행여 책을 뽑아 보면서 어딘가 얹어두었다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주인은 ‘다른 일’로 바빠 책탑을 쓰러뜨리지 않는 손의 행태에 무관심하다. 책값 치를 때 비로소 눈을 마주칠 수 있다. 눈치보지 않고 책구경하기 마춤하다. 단, 우산 따위를 들고 가지 말 것. 행여 책을 뽑아 보면서 어딘가 얹어두었다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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