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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비극의 한가운데 스스로 두 발로 선 인간

등록 2009-05-22 20:49수정 2009-05-22 20:50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2〉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2〉
그리스비극 후기 대표작가 전집
천병희 교수가 원전으로 완역
비극 이끄는 인간 심리 입체화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2〉
에우리피데스 지음·천병희 옮김/숲·각 권 2만8000원·3만원

‘그리스 정신의 가장 위대한 구현’으로 불리는 3대 비극작가의 작품이 완역됐다. 그리스·로마 고전 번역에 매진하고 있는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말 <아이스퀼로스 전집>(전 7편)과 <소포클레스 전집>(전 7편)을 펴낸 데 이어 이번에 <에우리피데스 전집>(전 19편)까지 완역·출간함으로써 그리스 3대 비극작가의 작품 전체가 국내 최초로 원전 번역을 통해 한국어본을 얻었다. 그리스 정신의 깊숙한 곳을 우리말로 읽어낼 수 있게 된 셈이다.

세 비극시인은 그들의 고국 아테네의 전성기가 낳은 아들들이자 기원전 5세기를 그리스 문화의 황금기로 만든 주역들이다. 후대의 그리스인들은 세 사람을 모두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과 연결해 기억했다고 한다. 살라미스 해전은 페르시아 대군의 침략에 맞서 아테네가 승리함으로써 그리스 패자가 되는 기점이다.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456)는 45살 때 이 해전에 전사로 참가해 싸웠다. 10대 소년이었던 소포클레스(기원전 497~406)는 해전 승리를 찬양하는 축제에서 합창단 선창자로서 신을 찬미하는 노래를 불렀다. 또 그리스인들은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5~406·사진)가 이해에 출생했다고 믿었다. 실제로는 그보다 4~5년 앞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쨌거나 이 일화에는 세 비극시인을 살라미스 해전과 함께 기억하려는 그리스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 요컨대, 세 비극작가는 아테네의 영광과 거의 동일시되는 인물들인 것이다.

세 사람은 그리스 비극 전성기의 초기·중기·후기를 각각 대표한다. 가장 앞선 아이스퀼로스는 합창 중심의 조잡한 무대에 대화를 도입함으로써 비극을 정립한 사람이다. 아이스퀼로스와 더불어 비극이 비극으로서 탄생했다. 소포클레스는 극중 대화 장면을 늘리고 규모를 키움으로써 비극을 완성시켰다. 이어 에우리피데스는 인물들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구현함으로써 비극의 성격을 전환했다. 에우리피데스 이후로도 그리스 비극은 만들어졌지만 한번도 앞 시대의 영화를 재현하지는 못했다. 3대 비극작가와 함께 그리스 비극은 태어나고 완성되고 변모한 뒤 사멸하고 만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 아테네 문화의 흥성과 쇠퇴를 반영한다.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5~406)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5~406)
세 비극작가의 작품은 거의 모두 영웅 신화를 소재로 삼는다. 그러나 주제로 들어가면 세 사람의 작품 세계는 뚜렷하게 나뉜다. 아이스퀼로스 비극의 주인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이다. 신들은 인간들의 운명에 직접 개입한다. 인간은 ‘죄와 벌’의 사슬에 묶여 극한의 고통에 몸부림친다. 아이스퀼로스의 최고 성과로 꼽히는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이 죄와 벌의 긴 사슬을 장대하게 보여준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기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자, 왕비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돌아온 왕을 죽여 딸의 원수를 갚는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게 복수한다. 오레스테스의 복수는 모친 살해라는 또다른 죄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갈등하는 오레스테스에게 복수를 명령하는 이가 아폴론이다. 신이 주재하는 질서 안에서 한없이 고통받던 인간이 그 고통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 아이스퀼로스가 비극을 통해 보여주려 한 세계인식이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간이다. 주인공이 신에서 인간으로 바뀐 것이다. 소포클레스에게 신들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들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운명은 당혹스러운 수수께끼다. 그 운명 안에서 인간은 결연한 의지로써 난국을 돌파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인간은 운명의 수렁에 빠져든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자기 나라에 역병이 돌게 된 원인이 선왕의 억울한 죽음에 있다는 말을 듣고 무슨 일이 있어도 선왕 살해자를 찾아내 응징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결국 그 자신이 범인으로 밝혀지는데, 스스로 현명하다고 믿었던 오이디푸스는 ‘보고도 보지 못한’ 자신의 눈을 찌르는 자기 응징을 감행한다. 소포클레스와 더불어 ‘비극적 아이러니’는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며 운명에 갇힌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인식하게 한다.

에우리피데스에 이르러 인간은 신과 무관한 인간 자신이 된다. 인간들은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되 모든 결과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존재다. 이때 비극을 끌어가는 힘으로 등장하는 것이 인간 내면의 심리작용이다. 증오와 사랑, 고통과 환희라는 내면의 격정이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에우리피데스 비극의 인물들은 격정 속에서 복수의 칼을 휘두른 뒤 후회와 두려움에 휩싸인다. 에우리피데스가 비극을 쓰던 때는 아테네 정치가 위태로운 국면에 접어든 때였다. 그의 작품에는 쇠락해가는 시대의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으며, 안으로 민주주의가 위축되고 밖으로 제국주의적 행패가 심해진 아테네에 대한 깊은 걱정이 담겨 있다. 옮긴이는 이런 시대비판적 태도 때문에 에우리피데스가 앞 시대 작가들만큼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의 우려는 펠로폰네소스전쟁 패배 후 아테네 몰락으로 현실이 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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