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버무린 천진한 상상력
복고적 아름다움 정수 보여줘
고향인 충북 보은에서 시만 쓰며 살고 있는 송찬호(50·사진) 시인이 네 번째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에 있다/ 고삐 매여 있지 않은 녹슨 기관차 한 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기저기/ 철로변 꽃을 따 먹고 있다”(<민들레역> 부분)
시집을 관류하는 것은 동화적이랄까 동시적이라 할 수 있을 천진한 상상력이다. ‘지천명’에 알아듣게 된 하늘의 뜻이란 곧 어린아이의 시선이라는 말일까. 문명과 세속을 멀리하고 자연과 상상력을 버무리는 송찬호씨의 시들은 어른의 문턱을 넘으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순진과 무구(無垢)를 오롯이 되살려 놓는다.
“별을 헤는 밤, 한때 우리는 저 기린의 긴 목을 별을 따는 장대로 사용하였다 기린의 머리에 긁힌 별들이 아아아아- 노래하며 유성처럼 흘러가던 시절이 있었다”(<기린> 부분)
“부부는 낮에는 음식을 팔고 저녁이면 하늘의 별을 닦거나 등성을 밝히는 꽃등의 심지에 기름을 붓고 등산객들이 헝클어놓은 길을 풀어내 다독여주곤 한다”(<반달곰이 사는 법> 부분)
기린의 목을 장대로 사용하여 별을 따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은 지금은 지나가 버렸지만, 하늘의 별을 닦고 꽃등의 심지에 불을 밝히는 신혼의 반달곰 부부는 아직 남아 있다. 반달곰 신혼부부가 곰을 닮은 인간을 가리키는지, 도토리묵과 부침개와 맑은바람차를 파는 간이휴게소의 주인 부부가 지리산에 방사된 반달곰을 은유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시인의 천진한 상상력 속에서 그 둘은 구분할 수 없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그 상상력을 시인은 “고양이 철학”이나 “고래의 꿈”, 또는 “소인국 이야기”처럼 다채롭게 부른다.
“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쪼그려 앉아야 한다// 책 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 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큰 호수”(<채송화> 부분)
여기서의 “이 책”이란 물론 낮은 꽃 채송화를 뜻하지만, 그것은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 시집을 읽기 위해서는 쪼그려 앉아서 시선을 낮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작고 여린 소인국의 주민들을 제대로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당가 분꽃들은 노랑 다홍 빨강 색색의 전기가 들어온다고 좋아하였다/ 울타리 오이 넝쿨은 5촉짜리 노란 오이꽃이나 많이 피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닭장 밑 두꺼비는 찌르르르 푸른 전류가 흐르는 여치나 넙죽넙죽 받아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옛날 옛적 우리 고향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무렵,> 부분)
“맨드라미 머리에 한 됫박 피를 들이붓는 계관(鷄冠)식 날이었다/ 폭풍우에 멀리 날아간 우산을 찾아 소년 무지개가 집을 떠나는 날이었다/ 앵두나무 그늘에 버려진 하모니카도 썩은 어금니로 환하게 웃는 날이었다”(<맨드라미> 부분)
“달팽이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작은 언덕길”과 “청개구리 청소년수련원의 번지점프 도약대”(<토란 잎>)가 있는 토란 잎, “나무 위쪽에 빠끔한 하늘을/ 그냥 흑판으로 쓰는 작은 산비둘기 학교”(<오동나무>)가 있는 오동나무, 둠벙의 소금쟁이 학교와 나팔꽃 우체국이 있는가 하면 혼자 남은 산토끼 똥이 산토끼를 그리워하는 마이크로 코스모스가 송찬호의 시세계다. 지난해 미당문학상 수상작인 <가을>은 백석과 이용악, 또는 정지용 같은 1930년대 시인들의 시를 연상시키며 복고적 아름다움의 정수를 보여주는 가편이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가을> 부분)
최재봉 문학전문 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