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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신문엔 쓸 수 없었던 ‘세상의 바닥’

등록 2009-10-08 18:00수정 2009-10-08 19:28

소설가 김훈
소설가 김훈
김훈 장편소설 ‘공무도하’
일간지 사건 기자 주인공 시각
건조한 문체 약육강식 현실 담아




김훈씨의 새 장편소설 <공무도하>(문학동네)는 기자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입사한 지 5, 6년쯤 된 일간지 사건 담당 기자 문정수가 그다. 그동안 역사소설을 주로 써 온 김훈씨가 자신의 기자 경력을 살린 ‘현대물’을 새 작품으로 준비한다는 말이 돌 때부터 이 소설은 관심을 끌어 왔다.

<공무도하>의 주인공 문정수가 하는 일은 전형적인 사건 담당 기자의 그것이다. 그는 자신이 맡은 구역의 경찰서를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사건·사고를 취재하고 그것을 기사로 쓴다. 의붓딸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친부를 살해한 아들의 이야기, 기르던 개한테 물려 죽은 초등학생의 일, 홍수 때 물난리를 피하기 위한 이웃 동네 주민들 사이의 패싸움, 백화점 화재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문정수는 우리 사회에서 기자에 대해 지니고 있는 하나의 통념-그러니까 정의감에 불타는 지사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기자로서 그는 자신이 목격하고 확인한 사실(팩트)에 입각해서 메마른 기사를 쓸 뿐,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불평등 같은 구조적 악에 기사로써 맞서고자 하는 의기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가 일개 사건 담당 기자라는 한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자라는 전형성에 묻히지 않는 그 나름의 개성과 특이성에서 기인한 바가 더 커 보인다. 예컨대 그는 개에 물려 죽은 초등학생의 이혼한 어미를 수배하라는 선배 기자의 명령에 소극적으로 응하며, 백화점 화재 현장에서 억대의 귀금속을 빼돌린 소방관의 범행을 눈치채고도 그것을 기사화하지 않는다. 그 소방관이 나중에 신부전증 때문에 탈법적으로 콩팥 이식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신문에 쓸 수 없는 것들, 써지지 않는 것들, 말로써 전할 수 없고, 그물로 건질 수 없고, 육하(六何)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세상의 바닥”을 그는 이따금씩 여자친구인 노목희에게나 말해 줄 따름이다(아마도 그렇게 기사로 쓰지 못한 것들이 ‘기자 김훈’을 ‘소설가 김훈’으로 바꾸어 놓았으리라).


〈공무도하〉
〈공무도하〉
<공무도하>가 하나의 핵심적인 사건이나 줄거리를 좇는 소설은 아니다. 문정수의 취재망에 걸린 사건들의 연쇄, 그리고 기사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문정수와 노목희의 관계 및 출판사 편집자인 노목희가 만드는 책과 관련된 이야기가 소설의 대강을 이룬다. 그럼에도 미군 폭격장이 있고 간척이 진행되는 서해의 어촌 해망이 비교적 중요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무대가 된다. 해망은 문정수가 해안초소에서 소총수로 군복무를 했던 곳이자, 개에게 물려 죽은 초등학생의 외가가 있는 곳이고, 노목희의 대학 선배인 장철수가 고향 창야를 떠나 정착한 곳이며, 백화점 귀금속 절취범인 소방관 박옥출이 퇴직하고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의 경찰서 출입 기자인 문정수가 이런저런 까닭으로 자주 해망에 출몰한다는 사실이 조금 어색한 대로, 소설 속에서 해망은 현실의 축소판으로 구실한다. 진부한 욕망과 지리멸렬한 다툼, 그리고 하릴없는 체념이 해망이라는 이름의 현실을 특징짓는다.

기자의 시점에 의존하는 만큼 소설의 문체는 건조하다 못해 심지어 ‘군사적’이기까지 하다. 장마전선의 내습이 초래한 재난을 묘사한 도입부도 그러하지만, 특히 아래와 같은 문장들은 노래방에서 악을 써 가며 ‘전선 가요’를 부르는 김훈씨의 모습을 떠오르게도 한다.

“공유수면의 마른 펄에 억새와 민들레가 서식지를 넓혀갔다. 억새는 폐선착장 주변에 들러붙어 거점을 확보했다. 억새는 펄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북쪽으로 세력을 전개했다. 민들레의 무리는 땅바닥을 긁는 포복의 대열을 이루며 소금기가 점차 빠져나가는 펄의 안쪽으로 진출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인터넷에 연재하면서 “‘공무도하가’는 강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더러운 세상에서 함께 살자는 노래”라고 적었다. 이곳이 비록 정토(淨土)는 아니지만, 예토(穢土)에서 부대끼며 정토를 그리워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몫이라는 뜻일 게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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