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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버지 닮은 탓에 울지 않습니다”

등록 2009-11-27 20:28

〈아버지, 그리운 당신〉
〈아버지, 그리운 당신〉




〈아버지, 그리운 당신〉
곽효환·최동호 엮음/서정시학·1만1000원

여기 서른여섯 명의 아버지가 있다. 문인인 아버지, 문인의 아버지, 그리고 문인의 아버지이자 그 자신 문인인 아버지. 아버지에 관한 글 모음 <아버지, 그리운 당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그렇게 세 개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흥미로운 셋째 범주에 드는 것이 황동규 시인의 부친인 소설가 황순원, 소설가 조정래씨의 부친인 시조시인 조종현, 시인 성기완씨의 부친인 성찬경 시인, 그리고 소설가 한강씨의 부친인 소설가 한승원씨 등이다. 박태원·김광섭·유진오·이효석 등 근대 문학의 거목들이 첫째 범주에, 시인 신달자·신대철·정호승씨와 소설가 박범신·공지영씨 등의 부친들이 둘째에 해당한다.

박태원의 장남 박일영씨는 첫아들을 낳은 기쁨으로 부친이 손수 제작한 <천자문>을 회고한다. 하늘 천 따 지, 첫 두 글자를 부모가 나누어 쓴 다음 나머지 998 글자는 각기 다른 사람의 필체로 채운 ‘천인 천자문’이다.

이인성씨는 부친인 역사학자 이기백의 유언을 소개한다. “내 무덤 앞의 작은 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넣었으면 좋겠다. -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아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이런 유언은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 대한 공적 책임을 지닌다고 전제된 삶, 그 책임을 올바르게 실천해야 한다고 굳건히 믿으며 전개된 삶”을 산 사람이 남길 법한 마지막 말씀이다.

젊은 자식들은 흔히 아버지를 저항과 극복의 대상으로 삼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결국 화해에 이르게 된다. 성기완씨는 “내 시는 아버지 세대의 시와 다르다고 생각”했고, 학생 시절 그 자신은 운동권도 아니면서 “아버지와 격렬하게 논쟁을 했다.”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달리 팝과 재즈를 듣고 기타를 치게 되었다. 그렇지만 칠십대 중반의 나이에 여전히 쇳덩이 오브제를 제작하고 한 글자로 된 시를 쓰며 퍼포먼스를 즐기는 아버지의 실험 정신이 자신에게 닿아 있다는 사실을 지금은 알게 되었단다.

학생운동 때문에, 평생 단 한 번도 야단을 친 적이 없었던 아버지와 사이가 벌어지고 “아버지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했어야 했”다는 공지영씨는 지금은 “내가 그와 너무도 닮은 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또 기쁘다”고 말한다. 빨치산 출신 아버지의 매사에 합리적인 태도에 학을 떼던 소설가 정지아씨. 치매 증세가 찾아온 여든 살 아버지를 보며 “마음은 얹힌 듯 먹먹한데, 아버지 닮은 나는 울지는 않는다.”

잡문을 일절 쓰지 않았던 부친과 달리 산문집을 다섯 권이나 냈으며,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대학에서의 강의 말고 다른 곳에서는 강연을 거의 하지 않았던 부친과 달리 국내외 문학 강연을 즐겨 다녔으며, 평생 문학에 관한 독서만 했던 부친과 달리 역사·철학·사회학·종교 관련 서적을 더 즐겨 읽었다는 황동규 시인도 ‘후회만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좋다’는 태도라든가 책 정리를 잘 안 하는 습관 등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 많은 것은 틀림없다”고 인정한다.


이 밖에도 신문·잡지에 실린 시를 스크랩해 두곤 했던 신대철 시인의 아버지, <태백산맥>을 읽고 자식 키운 보람을 느꼈다는 조정래씨의 부친, 군사정권 시절 검찰총장에 안기부장까지 지냈던 소설가 서하진씨의 부친, 평생 장돌뱅이로 사셨다는 박범신씨의 아버지 이야기 등이 두루 흥미롭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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