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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귀가 서러운 시대’…어머니에 바치는 송가

등록 2010-01-28 17:45수정 2010-01-28 19:15

이대흠 시인
이대흠 시인
이대흠 시집 ‘귀가 서럽다’
자식이라면 늘 애가 타는 모성
살가운 남도 사투리로 생생하게 담아




어머니의 검은 귀에 바치는 송가. 이대흠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귀가 서럽다>(창비)의 세계를 이렇게 요약해 보자.

“몸이 검다는 것은 울음이 많이 쌓였다는 것/(…)/ 온갖 소리 다 스민/ 저 아래에서/ 도대체 뿌리는 얼마나 많은 귀일까”(<고매〔古梅〕에 취하다> 부분)

“오래된 것들은 지나온 세월만큼 얼굴이 검습니다 하찮은 것도 쉬이 흘리지 못하고 받아들인 덕분입니다 고목나무 뿌리가 저렇게 검은 것도 돌이 되어 가라앉는 누군가의 속울음에 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시간의 뿌리> 부분)

인용한 시들에서 검은 귀라는 이미지는 연민의 시간의 축적을 상징한다. 오랜 세월 누군가의 울음에 귀 기울인 결과가 검은 얼굴 또는 몸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할 때 검은색이란 시간에 따른 오염 및 마모와 더불어, 애태우며 안쓰러워하는 마음을 가리키게 되며 귀는 그 몸과 마음의 가장 예민한 촉수에 해당한다 하겠다.

오랜 세월에 걸친 고통과 연민으로 검게 변한 수족이 거꾸로 향기와 생명의 원천이 되는 역설을 다음의 두 시에서 만날 수 있다.

“뒤란에 매화향 가득하다// 참 많이 앓았겠다”(<열이 오르다> 부분)

“꽃무릇도 상사화도 기린초도 수선화도/ 어머니의 검은 손이 닿자 갑자기 명랑해진 아이처럼/ 무어라 무어라 말을 해대며 생기를 띠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손에는 내 손에 없는 귀가 수백 개/ 수천 개 열려 있는 것이었다”(<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 부분)


이 시집은 모두 4개의 부로 나뉘어 있는데 제2부에 실린 16편은 오롯이 어머니의 사랑을 기리는 데에 바쳐진다. 그 중 싱가포르로 돈 벌러 간 큰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중학생인 시인에게 받아쓰게 하는 형식의 시에는 끝없이 베풀면서도 언제나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뿐인 우리네 전통 어머니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귀가 서럽다>
<귀가 서럽다>
“큰 악으야 여그도 이라고 더운디 노무 나라에서 얼매나 땀 흘림시롱 고상허냐? 니 덕분에 아그들 학비 꺽쩡은 읎다마는 이 에미가 니럴 볼 면이 읎따 늑 아부지도 잘 있고 아그들도 잘 있시닝께 암 꺽쩡 하들 말고 몸조리나 잘하그라 저번참 핀지에 내 물팍 아푸냐고 물었는디 내 몸땡이는 암상토 안항께 꺽쩡얼 허들 말어라”(<오래된 편지> 부분)

제도권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어머니의 투박한 입말은 먼 나라에서 고생하는 아들을 향한 짠한 마음을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전남 장흥 태생인 시인은 <이름만 이삐먼 머한다요>(2007)라는 ‘사투리 산문집’을 낸 적도 있거니와, 이번 시집에도 표준어의 틀에 매이지 않은 살아 있는 토속어를 적극 활용한 시를 여럿 포함시켰다. 그 가운데에서도 <아름다운 위반>은 사투리로 표상되는 인정과 신뢰의 세계를 콩트의 한 장면처럼 압축해서 보여준다.

“기사 양반! 저짝으로 조깐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란다요 버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제/ 쓰잘데기 읎는 소리 하지 마시오/ 저번챀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가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챀에도/ 내가 모셔다드렸는디”(<아름다운 위반> 전문)

그렇다고 해서 사투리가 사라져 가는 가치의 담지자로서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 <하고댁> <수문 양반 왕자지> <황영감의 말뚝론>처럼 사투리를 토속적 에로티시즘과 결합시킨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사랑의 정서를 사투리 특유의 은근한 어조에 얹어 노래한 연시도 있다.

“보리숭어라는 거 복송꽃 필 때라/(…)// 파닥파닥 복송꽃 피고 타랑타랑 복송꽃 지고/ 마음이 똑 옻 오른 것맹이로 근지러워서 이녁 생각만 하여도 스리슬쩍 내 안에서 알이 슬 때라”(<도화의 말을 적다> 부분)

이 시를, “아이를 낳아보고 싶습니다”로 시작되어 “살려내는 우주를// 낳고 싶습니다”로 끝나는 시집 앞머리의 시 <봄>과 연결시켜 보자. 연인을 향한 사랑이 생명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대지적 모성의 세계가 거기 펼쳐지지 않겠는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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