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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시궁창 현실…뒹굴어라 ‘철학’

등록 2010-01-29 19:31수정 2010-01-29 19:40

〈더러운 철학〉
〈더러운 철학〉
‘현실 외면한 위선’ 자가당착 비판
“더러움 무릅쓴 정치실천 감행해야




〈더러운 철학〉
김진석 지음/개마고원·1만5000원

일찍이 ‘철학의 빈곤’에 관한 책을 쓴 철학자는 있었지만 ‘철학의 더러움’에 관한 책을 쓴 철학자는 여태 없었던 듯하다. 철학자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쓴 <더러운 철학>이 ‘철학의 더러움’에 관한 최초의 책이 아닐까. “철학은 더럽다”라고 선언하는 이 책은 철학이 왜 더러운지, 어떻게 더러워졌는지 따져보는 철학적 에세이자, 철학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의 더러움을 진단하는 정치적 에세이기도 하다. 지난 10여년 우리 사회 현실에 개입해 적극적으로 발언해왔던 지은이의 정치적·철학적 고민이 ‘더러움’이라는 말에 집약돼 있다.

지은이는 먼저 자신의 직업이자 소명인 철학의 존재론적 현황 혹은 철학자의 실존적 사태를 고백조로 규명한다. 오늘날 철학은 더러운 학문이 되었고, 철학자는 더러운 직업이 되었다는 것이다. “철학적 말들이 대상을 찾지 못하고 제 집도 찾지 못한 채 더러운 바닥에서 방황하고 뒹구는 모습”이 오늘 철학의 실상이다. 철학이란 보편적인 개념을 통해 세계의 근본, 문제의 근원을 따져들어가 밝혀내는 고상하고도 심오한 일을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지은이가 보기에, 오늘날 철학은 이런 지위를 잃고 더러운 진창에 떨어졌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더러움을 인정하지 않고 고고한 표정을 짓는 것, 이것이 철학의 진짜 더러운 모습임을 알지 못하는 철학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더러움을 인정하고 더러운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두고 말 것인가. 지은이는 이 더러움의 와중에도 철학의 할 일이 있고 철학의 출구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이 더러움에 빠졌음을 흔쾌히 인정하고, 이런저런 세상의 더러움을 다 받아들여 그 더러움을 무릅쓰는 것이다. 더러움과 함께 더러움 속에서 뒹굴면서 기어 나아갈 때 세상의 더러움을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진단 혹은 해법에 이어, 이 책은 철학이 더러움에 빠진 상황을 보여준 뒤, 그 더러움을 무릅쓰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실례를 들어 설명한다.

철학자 김진석 인하대 교수
철학자 김진석 인하대 교수
지은이가 더러움에 빠진 철학의 사례로 거론하는 것이 ‘노자 철학의 무위자연’이다. 노자의 무위자연이라는 말은 ‘더러운 현실’의 대안으로 자주 제시되는 개념이다. 환경파괴적·생태착취적 자본주의 삶의 대안이 노자의 무위자연이다. 그런데 노자의 무위자연을 그렇게 갖다 쓰는 것이야말로 노자 철학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듣기 좋고 보기 좋아 무위자연이지, 그 개념을 현실에서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가. “지식인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말과 지식을 통한 위선을 말과 지식으로 경계하는 것 아닌가?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무위자연을 말하는 지식인들의 태도는 얼마나 공허한가?”

이 공허한 허세 때문에 무위자연은 더러운 말이 되고 만다. 무위자연을 앞세운 생태주의는 또 ‘생태 근본주의’ 담론이 될 위험성이 있다. 지은이는 생태 근본주의가 그 근본주의적 태도로 현실의 더러움을 모조리 부정하다가 ‘위선’이라는 더러운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결국 삶의 구질구질함과 거리를 두고 마냥 고고해지는 철학적 담론은 자신이 부정했던 더러움, 곧 자기기만의 언어가 되고 만다. 지금 수없이 많은 학문 담론들, 지식인 언어들이 이 위선에 빠져 있다고 지은이는 진단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더러움을 회피하지 않고 그 더러움과 정직하게 만나는 길은 없을까? 지은이는 여기서 ‘더러움을 무릅쓰기’를 제안한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이 ‘노마디즘’(유목주의)과 관련한 논쟁들이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이야기한 노마디즘은 국가·지배·억압에서 탈주하는 삶의 긍정적인 사태를 설명하는 용어로 요즘 유통되고 있다. 지은이는 노마디즘을 이렇게 ‘착한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노마디즘 자체에 대한 리얼한 인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노마디즘은 언제나 ‘전쟁기계’와 결부된 말이었다. “유목민이야말로 전쟁기계의 발명자다.” 전쟁기계는 공격성·침략성·폭력성을 내장한 장치다. 그러므로 전쟁기계를 이야기하지 않고 노마디즘만 이야기하는 것은 유목주의의 더러운 측면을 외면하는 일이다. 유목주의와 전쟁기계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유목주의는 국가를 공격할 수도 있고 해체할 수도 있고, 동시에 억압과 폭력을 저지를 수도 있다. 전쟁기계가 없는 ‘착한 노마드’는 노마디즘의 현실을 가리는 기만의 개념, 그래서 더러운 개념이다.


전쟁기계와 결부된 노마디즘이 폭력과 전쟁의 개념이고 그래서 삶의 더러움에 물든 개념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전쟁기계의 그 더러움을 무릅쓰는 노마디즘 개념이야말로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는 개념이자 현실의 더러움을 닦아낼 수 있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더러움 속에서 더러움과 함께 나아가는 존재를 지은이는 ‘더러운 주체’라고 명명한다. 엉뚱하고 삐딱한 주변인들, 곧 더러운 주체들이 정치에 대해 발언하고 정치적 실천을 감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더러운 철학이 살아 있는 철학이고, 더러운 주체가 살아 있는 주체다. 지은이는 그렇게 생각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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