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우/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마르크스·엥겔스 ‘공산당 선언’
역사는 사건들로 이루어지며, 커다란 사건들은 시간의 지도리를 만들어낸다. 커다란 사건들은 수평으로 흐르는 시간의 어느 시점에서 수직으로 솟아올라 그 시점을 시간의 지도리로 만들며, 그 지도리가 사건의 이전과 이후를 만들어낸다.
사건들은 언어로 기억되어 기억의 지평에 남겨진다. 그러나 사건이 언어화되는 것만은 아니다. 언어가 사건화되기도 한다. 즉 사건이 일어나 그것이 담론화되는 것이 아니라 담론이 하나의 사건을 발생시킨다. 다시 말해, 하나의 담론이 그 자체 사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담론은 시간의 지도리를 만들어내며, 시간/역사를 그 담론의 탄생 이전과 이후로 가른다.
이러한 담론-사건은 때때로 ‘선언’의 양식을 띤다. 선언이란 세상을 향한 외침이고, 미래를 향한 다짐이며, 행위를 향한 선동이다. 선언에는 논증적 저작이 갖는 치밀함과 상세함이 빠지는 대신에 시대적 상황이 주는 생동감과 실천을 향한 절박함이 깃든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에 작성한 <공산당 선언>은 혁명의 시대인 19세기의 한가운데에서 솟아오른 담론-사건으로서, 공산주의의 역사를 이전과 이후로 가른 선언이다. 그것은 19세기 공산주의의 역사를 수놓은 걸작이다.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공산주의는 유령이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살아 있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현실과 간극을 두면서도 끝없이 현실에 출몰하는 존재, 특이한 의미에서의 ‘존재’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라는 현실과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실재로서, 현실과 간극을 두면서도 끝없이 현실에 출몰하는, 그래서 현실을 놀라게 하고, 위험에 빠뜨리고, 종국에는 무너뜨리려 하는 유령이다. 유령은 현실 속 인간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엥겔스는 말한다.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 하라.”
마르크스·엥겔스는 여기에서 반복과 필연, 그리고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엇이 반복되는가?
계급투쟁이 반복된다.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의 반복은 논리 공간에서의 반복이 아니다. 역사적 반복은 시간 속에서 솟아오르는 사건들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반복은 질적인 차이들을 동반하는 역사-속의-반복으로서 이해될 때에만 그 실재를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어떤 계급투쟁이 반복되는가? 귀족과 부르주아의 계급투쟁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으로 반복된다. 마르크스·엥겔스는 2월(3월) 혁명의 시대인 1848년에 계급투쟁의 반복을, 주연과 조연이 바뀌고, 주인과 노예가 바뀌는 또 하나의 반복을 외친다. 부르주아의 업적은 인정되어야 한다.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투쟁은 봉건귀족-부르주아의 투쟁이 성립했을 때에만 발생할 수 있는 것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엥겔스는 부르주아의 업적을 마음껏 찬양한다. 봉건사회의 타파, 생산력 증가, 기술적 혁신들, 세계시장의 창출…. 부르주아의 득세는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진정 바뀐 것은 지배의 양식일 뿐이다. 이제 무정한 ‘현금 지불’ 외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다른 어떤 관계도 남아 있지 않다. 파기할 수 없는 수많은 자유들은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상거래의 자유)로 대체된다. 변혁이 없는 존재는 사라진다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 등은 부르주아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 전락한다. 이제 끝없는 변혁이 없는 모든 존재는 사라져버린다.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에 녹아내리고, 신성한 모든 것이 모욕당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부르주아의 방식대로 개편된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형상으로 세계를 창조한다.” 무엇이 필연인가? 어떤 역사적 필연이 전개되고 있고, 그 필연으로부터 어떤 현실이 도래할 것인가? 부르주아가 봉건사회를 이렇게 무너뜨렸듯이, 이제 부르주아를 무너뜨릴 새로운 세력이 형성될 것이다. 아니 이미 형성되었고 또 움직이고 있다. 부르주아는 자본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적도 함께 길러냈다. 프롤레타리아는 전국에 뿔뿔이 흩어진 채 상호 경쟁으로 갈라진, 분열된 대중과 구분된다. 즉 프롤레타리아는 일정한 계급의식에 도달한, 집단적 행동에 돌입한 역사의 주체다. 철도는 넓은 지역의 프롤레타리아들을 집결시키고 있다. 계급투쟁 역사의 반복 노동자의 필연적 승리등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의 역사와 철학을 전세계에 공표했다
그 이후 한 세기동안 이 선언은 역사적 사건들에 지속적 영향을 끼쳐왔다
자본주의의 보편성은 역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보편성을 낳는다. 프롤레타리아는 처음에는 일국적 투쟁을 벌이지만, 자기 나라 부르주아지를 끝장낸 뒤 세계적 투쟁에 참여할 것이다. 자본과 노동의 적대는 필연적으로 혁명을 낳는다.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들을 만들어낸 셈이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는 둘 다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어떤 차이들이 존재하는가? 마르크스·엥겔스는 당시를 수놓은 다양한 공산주의/사회주의적 운동들과 공산당의 입장을 날카롭게 변별한다.
‘사이비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봉건적 사회주의는 부르주아를 견제하기 위한 귀족들의 마지막 몸부림일 뿐이다. 프랑스 정통 왕조파의 일부, ‘청년 영국’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결집시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동냥주머니를 깃발 삼아 흔들었다.” 마찬가지로 시스몽디가 대변하는 프티-부르주아들은 당대의 현실을 날카롭게 인식했으면서도 결국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닌 어중간한 타협으로 일관한다. 또 스스로를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떠벌리는 독일 사회주의는 프랑스의 현실적이고 비판적 사상들에 공허한 철학적 외투와 문학적 수사를 입혀 당대의 독일 현실에 맞지 않는 이야기, 프랑스의 현실과 독일 현실의 차이를 보지 못하는 엉뚱한 현학들을 늘어놓는다.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으로 대변되는 부르주아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을 동정하는 값싼 복지주의를 내세워 부르주아 지배를 공고히 하려 한다. 생시몽, 푸리에, 오언 등은 공산주의에 길을 내었으나 결국 공상적 이야기에 그치고 말았다.
이렇게 마르크스는 역사에서의 반복, 프롤레타리아의 필연적 승리, 공산당과 사이비 공산주의들과의 차이를 서술함으로써 공산당 운동의 역사와 철학을 전세계에 공표했다. 그 후 한 세기 동안, 그리고 어느 정도는 오늘날까지도 이 선언은 역사적 사건들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현대에 이르러 사회 현실은 여러 면에서 변화했다. 혁명도 공황도 자본주의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현실 사회주의는 대부분 관료주의로 변질되었다.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양극 구도는 다양한 사회 계층들과 세력들로 복잡해졌다. 초국적 기업들과 다국적 기업들은 (노동이 아닌) 금융자본주의를 활용해 부를 축적하곤 한다. 노동조합들은 (레닌이 우려했던) 임금 상승과 복지 증진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다. 계급의식은 마르크스·엥겔스 당대보다 오히려 더 희석되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지배적인 현실이 되었다. 학문과 예술도, 종교와 사상도 자본주의에 복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본주의화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대중 존재방식’ 논의의 출발점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지금도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으며, 여전히 현실을 놀라게 하기도 하고 위험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어쩌면 공산주의란 현실로서가 아니라 유령으로서, 현실과 간극을 두면서도 또 현실 속에 끝없이 출몰하면서 현실을 긴장하게 만드는,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이 변화하게 만드는 유령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의 주체로 생각했지만, 계급의식이 희석되어버린 프롤레타리아를 이은 역사의 주체는 누구일까? 푸코는 그것을 ‘타자’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수자’로,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으로 본다. 푸코는 ‘당’이 이미 권력기구로 화한 시대에 대중(특히 타자로서의 대중)의 자발적 실천을 겨냥해 사유했고 지식인을 인도자가 아니라 협력자로 새롭게 위치시켰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마르크스·엥겔스가 ‘룸펜 프롤레타리아’로서 비난했던) 소수자들에게서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네그리와 하트는 오늘날의 현실을 단 하나의 세계적인 ‘제국’의 시대로 파악하고 그 대립항으로서 ‘다중’을 사유하고 있다. 결국 프롤레타리아, 타자, 소수자, 다중은 대중이 띨 수 있는 다양한 존재방식으로서, 지금도 여전히 정치사상의 중심 주제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공산당 선언>은 이 모든 논의들의 출발점을 이루는 핵심적인 고전인 것이다.
서평자 추천 도서
공산주의 선언
마르크스·엥겔스 지음, 김태호 옮김
박종철출판사 펴냄(1998), 5000원
(여러 종류의 서문들과 풍부한 역주)
선언 150년 이후
보리스 까갈리쯔끼 외 지음, 카피레프트 옮김
이후 펴냄(1998), 1만1000원
(1998년 열린 파리 국제학술대회 발표 글 실어)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데이비드 보일 지음, 유강은 옮김
그린비 펴냄(2005), 9900원
(<공산당 선언>의 앞뒤 맥락을 잘 서술해)
50자 서평
◇ 서민(39·단국대 의대 조교수)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작금의 현실은 사회주의라는 견제장치가 없어진 자본주의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공산당 선언을 읽어야 할 이유다.”
◇ 손병목(35·국어논술 ‘일교시닷컴’ 이사)
“세계화가 낳은 몇몇 결과들을 흘끗 보기만 해도 <선언>의 지적은 여전히 신선하고 적절하며, 그래서 불온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 전자우편 이름 ‘주야’(jooya65)
“(스무살 무렵에 잘난 척 하려고 이 책을 집어들었는데, 그 후로 인생이 꼬였습니다. 지금은 그 꼬임을 받아들입니다. 기쁘게.) 과거에 대한 연민 없는 분석, 현재에 대한 위선 없는 비판, 미래에 대한 의심 없는 낙관…. 선언도 아름다울 수 있다.”
▽ 다음주 이후 고전(<광기의 역사> <에밀> <삼국유사>)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cheolwoo@hani.co.kr
계급투쟁이 반복된다.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의 반복은 논리 공간에서의 반복이 아니다. 역사적 반복은 시간 속에서 솟아오르는 사건들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반복은 질적인 차이들을 동반하는 역사-속의-반복으로서 이해될 때에만 그 실재를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어떤 계급투쟁이 반복되는가? 귀족과 부르주아의 계급투쟁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으로 반복된다. 마르크스·엥겔스는 2월(3월) 혁명의 시대인 1848년에 계급투쟁의 반복을, 주연과 조연이 바뀌고, 주인과 노예가 바뀌는 또 하나의 반복을 외친다. 부르주아의 업적은 인정되어야 한다.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투쟁은 봉건귀족-부르주아의 투쟁이 성립했을 때에만 발생할 수 있는 것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엥겔스는 부르주아의 업적을 마음껏 찬양한다. 봉건사회의 타파, 생산력 증가, 기술적 혁신들, 세계시장의 창출…. 부르주아의 득세는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진정 바뀐 것은 지배의 양식일 뿐이다. 이제 무정한 ‘현금 지불’ 외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다른 어떤 관계도 남아 있지 않다. 파기할 수 없는 수많은 자유들은 단 하나의 파렴치한 자유(상거래의 자유)로 대체된다. 변혁이 없는 존재는 사라진다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 등은 부르주아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 전락한다. 이제 끝없는 변혁이 없는 모든 존재는 사라져버린다. “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에 녹아내리고, 신성한 모든 것이 모욕당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부르주아의 방식대로 개편된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형상으로 세계를 창조한다.” 무엇이 필연인가? 어떤 역사적 필연이 전개되고 있고, 그 필연으로부터 어떤 현실이 도래할 것인가? 부르주아가 봉건사회를 이렇게 무너뜨렸듯이, 이제 부르주아를 무너뜨릴 새로운 세력이 형성될 것이다. 아니 이미 형성되었고 또 움직이고 있다. 부르주아는 자본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적도 함께 길러냈다. 프롤레타리아는 전국에 뿔뿔이 흩어진 채 상호 경쟁으로 갈라진, 분열된 대중과 구분된다. 즉 프롤레타리아는 일정한 계급의식에 도달한, 집단적 행동에 돌입한 역사의 주체다. 철도는 넓은 지역의 프롤레타리아들을 집결시키고 있다. 계급투쟁 역사의 반복 노동자의 필연적 승리등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의 역사와 철학을 전세계에 공표했다
그 이후 한 세기동안 이 선언은 역사적 사건들에 지속적 영향을 끼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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