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사회적 상상〉
찰스 테일러 지음·이상길 옮김/이음·2만원
<근대의 사회적 상상-경제·공론장·인민주권>은 정치철학자 찰스 테일러(1931~)의 2004년 저작이다. 테일러의 저작 활동은 ‘철학적 인간학’과 ‘서구 근대성 탐구’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책은 서구 근대성을 ‘사회적 상상’(social imaginaries)의 관점에서 살피는 저작이다. 지은이는 근대의 사회적 상상을 특징짓는 세 가지 형식으로 ‘시장경제’ ‘공론장’ ‘인민주권’을 제시한다. 이 세 가지 형식에 대한 탐구가 이 책의 본론을 이룬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테일러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경제학·정치학을 공부했다. 캐나다로 돌아온 뒤 맥길대와 옥스퍼드대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로 있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활동과 정치실천을 함께 한 다소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영국에 유학하던 시절에 신좌파 정치운동을 했으며, 귀국한 뒤에는 사회민주주의 계열 신민주당의 핵심 이론가로 활동했다. 자신의 정치적 열정과 경험을 철학적으로 담론화하려는 행동주의자의 면모가 저작마다 깊이 배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정치사상은 흔히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로 요약되는데,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 귀속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주요 고민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 고민의 과정에서 테일러는 ‘서구 근대성’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벌였는데, <근대의 사회적 상상>에서 그런 작업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제시한 ‘사회적 상상’이라는 말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를 연상하면 다소 수월하게 감이 잡힌다. 지은이 자신도 앤더슨의 그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본문에서 밝히고 있다. 집단적 상상이 현실적인 힘을 행사할 때 그것을 두고 ‘사회적 상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논리정연한 이론이 아니라 모호하고 흐릿한 이미지와 이야기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상상’이다. 이 사회적 상상 중에 결정적으로 근대를 규정한 세 가지 형식이 경제·공론장·인민주권이라는 것이 지은이의 기본 가정이다.
먼저 지은이는 ‘사회적 상상’이라는 것이 어떻게 싹터서 자라나는지를 설명한다. 시작은 이론이다. “이론이란 처음에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다가 소수 엘리트의 사회적 상상 속으로, 이어 사회 전체의 사회적 상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지은이는 17세기에 ‘근대적인 사회적 상상’을 뒷받침하는 이론이 처음 출현했으며, 그 이론을 제출한 사람이 네덜란드 법학자 휘호 흐로티위스(그로티우스·1583~1645)와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1632~1704)였다고 딱 짚어 말한다. 이 두 사람은 평등한 개인들이 계약을 체결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질서를 만든다는 관념을 이론으로 제시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개인들의 평등성과 상호이익인데, 이것이 바로 근대적 도덕질서의 핵심을 구성한다. 이 근대적 도덕질서가 사회적 상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상상 자체를 바꾸고 진전시킨다. 그 결과로 나타난 근대의 사회적 상상체가 ‘평등한 상호이익의 세계’ 곧 ‘시민사회’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 시민사회 가운데 첫 번째로 등장한 것이 ‘시장경제’다. 경제에 대한 근대적 이미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18세기 ‘정치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다. 평등한 개인들의 이기적 활동이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질서가 이 경제다.
지은이가 강조하는 두 번째 ‘사회적 상상’은 ‘공론장’이다. 공론장을 처음 제대로 규명한 사람은 위르겐 하버마스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18세기에 ‘공론’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서유럽에 처음 등장했으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일종의 토론 공간 안에서 서로 연결됐다고 말한다. 이때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묶어준 공통의 공간이 책·팸플릿·신문 같은 인쇄물이었다. 인쇄물 자체가 실제의 공간은 아니므로 공통 공간, 곧 공론장은 장소를 초월한 일종의 ‘상상적 존재’다. 그러나 이 공론장은 정치권력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테일러는 공론장이 권력의 외부에 있다는 점이야말로 고대의 아고라와 다른 점이라고 강조한다. 고대 그리스의 토론장인 아고라가 권력을 직접 행사하는 정치 내부의 장이었음과 달리, 근대의 공론장은 정치 외부에서 정치권력에 영향을 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론장이 정치에 규범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배후에 ‘인민주권’의 관념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공론을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민이며, 이 인민이 주권자이므로 정치권력이 인민의 감독과 견제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인데, 이런 생각을 통해 ‘스스로 지배하는 주권적 인민’이라는 ‘사회적 상상’이 사회 전체로 퍼졌다. 그 결과는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이었으며, 이 두 혁명은 인민주권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테일러는 이 책의 근대성 논의를 더 밀고 나가, 2007년에 펴낸 대작 <세속의 시대>에서 포괄적으로 상술했다고 옮긴이는 전한다.
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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