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
강대진 지음/그린비·2만1000원
그린비 출판사의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는 <오디세이아>와 짝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 서사시 <일리아스>를 소개하는 책이다. 이 책은 국내 연구자가 쓴 최초의 <일리아스> 해설서라고 할 수 있는데, 지은이 강대진씨는 <일리아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 분야 전문가다. 지은이는 ‘고전은 지루하다’는 흔한 탄식이 나오는 것은 “고전 읽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라고 말한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낯선 언어의 텍스트를 재미있게 읽으려면 그 텍스트에 대한 사전 지식과 정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잘 아는 길을 안내하듯 이 책에서 <일리아스>의 특징과 성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지은이는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호메로스 문제’라는 것을 거론한다. 고전 연구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된 것이 이 ‘호메로스 문제’인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지은이로 거론되는 호메로스(사진)가 어떤 존재냐 하는 문제다. 연구자들은 호메로스가 기원전 8세기에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에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두 서사시가 동일 인물의 작품인지 아니면 작가가 서로 다른지는 의견이 팽팽하게 갈려 있는 상태다. 이 책에서는 어느 한쪽에 가담하지 않고 ‘<일리아스>의 시인’, ‘<오디세이아>의 시인’이란 식으로 중립적인 표현을 쓴다.
<일리아스>는 그리스(헬라스·희랍) 연합군이 트로이아 연합군과 맞붙어 싸운 10년의 전쟁, 곧 트로이아 전쟁을 그린 이야기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10년이 아니라 전쟁 막바지 시기의 50일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나흘 동안의 전투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일리아스>의 시인은 전쟁의 발단에서부터 결말까지 시간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결정적인 국면으로 바로 뛰어들어가 거기서부터 사건을 서술한다. 이런 서술을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사태 한가운데로’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중심 사건 속으로 뛰어들어간 뒤 차차 그 앞과 뒤를 채워나감으로써 전쟁 전체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리아스>에서 포착되는 그 ‘사건’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일리아스>의 ‘서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를.”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연합군 최고의 장수이자 이 서사시의 사실상 주인공인데, 이 영웅이 터뜨리는 분노에서 이야기가 전개돼 점차 트로이아 전쟁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눈치챌 수 있듯이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일리아스>의 핵심적 주제를 구성한다. “이 서사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방향을 틀어서 어떤 식으로 해소되는지 노래하고 있다.” 트로이아 전쟁이 <일리아스>의 배경을 이루는 ‘먼 주제’라면,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이 서사시의 몸통을 이루는 ‘가까운 주제’인 셈이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일리아스>의 형식적 특성은 ‘반복 구조’다. <일리아스> 전체 24권은 아주 독특한 반복 형식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다. 먼저 수미 쌍관적 구조를 거론할 수 있다. 처음 1~3권의 이야기 구조가 마지막 22~24권의 구조와 같다. 더 오묘한 것은 작은 단위의 반복이 큰 단위의 반복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프랙털 구조를 이 작품이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트로이아 전쟁의 원인이 그리스 최고의 미인 헬레네를 트로이아에 빼앗긴 데 있듯, 아킬레우스 분노의 원인은 자신이 전리품으로 얻은 여인을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빼앗기는 데 있다. 또 트로이아의 영웅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의 절친한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죽이고, 여기에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이는 그 연쇄 과정도 반복 구조를 보여준다.
<일리아스>와 같은 고전 서사시를 읽을 때 주의할 점은 ‘상투적 관용구’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아폴론을 말할 때는 ‘멀리 쏘는 아폴론’이라 하고, 아킬레우스는 ‘발이 빠른 아킬레우스’라고 한다. “이 영웅은 항상 발이 빠른 것으로 되어 있어서 심지어 가만히 있을 때조차 이 수식어가 붙는다.” 지은이는 이런 관용구가 시의 운율을 맞추려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서사시가 가객의 ‘구송시’로 시작해 뒷날 문자로 정착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흔적인 셈이다.
<일리아스>는 고대 영웅시대를 찬양하는 작품인 만큼 귀족 영웅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예외적으로 영웅의 안티테제라 할 ‘악역’이 등장해 분위기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그 인물이 테르시테스인데, <일리아스>에서 이 악역은 이렇게 묘사된다. “그는 안짱다리에다 한쪽 발을 절었고 두 어깨는 굽어 가슴 쪽으로 오그라져 있었다. 그리고 어깨 위엔 원뿔 모양의 머리가 얹혀 있었고 거기에 가는 머리털이 드문드문 나 있었다.” <반지의 제왕>에 묘사된 ‘골룸’의 원형이 여기 있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는 것도 고전을 읽는 재미라고 할 수 있다. 고전은 수없이 변형되고 가공되는 상상력의 원석인 셈이다.
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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