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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웃기고 울리기로 작정한 ‘정감 있는 말들’

등록 2010-03-25 19:08

이정록(46)
이정록(46)
이정록 여섯번째 시집 ‘정말’
풍부한 이야기 ‘능청·해학’ 담겨
가여운것 향한 안쓰러운 연민도




시집과 소설집의 제목을 정하는 데에는 암묵적인 원칙이 있다. 해당 시집이나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 한 편의 제목 또는 작품 속 한 구절을 책 전체의 제목으로 삼는 것이다. 표제작이 그것이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김연수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가장 잘 알려진 경우다. 이 책에 묶인 아홉 단편에 정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은 없다.

새로 나온 이정록(46)의 여섯 번째 시집 <정말>(창비)을 또 하나의 예외로 추가할 수 있겠다. 이 책에 수록된 시 예순다섯 편 중에는 ‘정말’이라는 제목을 지닌 작품이 없다. 그럼 시 본문에는? 찾아 보니 시 세 편 속에 모두 네 번에 걸쳐 ‘정말’이라는 낱말이 나온다. <나도 이제 기와불사를 하기로 했다>와 <내포석재 애기불>에 한 번씩, 그리고 <참 빨랐지 그 양반>에 두 번.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이 시들에 나오는 네 개의 ‘정말’ 중 어느 하나를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시집 제목 ‘정말’은 어디서 온 것이며 무슨 뜻으로 쓰인 것일까?

독자로서는 시집 속에서 희미한 단서나마 찾아 볼밖에 다른 도리는 없을 터이니, 우선 ‘정말’이라는 말이 들어간 시 세 편을 살펴 보자. <나도 이제 기와불사를 하기로 했다>는 시인이 금강산에서 열린 문학행사에 참가한 길에 신계사 터에서 주운 기와 조각을 기념품 삼아 숨겨 나오려다 들켜서 북측 세관원과 주고받은 대화를 소개한다. “뉘기보다 조국산천을 사랑해야 할 시인 동무께서 이래도 되는 겁네까?”라며 추궁을 시작한 세관원이 “있던 자리에 고대로 갖다놓아야 되지 않겠습네까?”라고 겁을 주다가 “그럼 그쪽 사정을 백천번 살펴서 우리 측에서 갖다놓겠습네다”라고 한 발 물러서자 그제야 안도한 시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정말 고맙습니다”였다.


시집 ‘정말’
시집 ‘정말’
<내포석재 애기불>은 서로를 성모 마리아와 성부에 견주는 내포석재 정씨와 그 부인 ‘민양’의 부창부수 이야기. 처음 차 배달을 나온 민양을 회고하면서 정씨가 하는 말이 “정말 성모 마리아가 다가오는 줄 알았당께”다.

이제 ‘정말’이 두 번 나오는 <참 빨랐지 그 양반>을 읽어 보자. 달리기도 빠르고 행동도 빨랐으며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남편을 회고하는 아내의 입말로 시는 이루어졌다. 처음 선을 보던 날 남편은 아내를 곧바로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워 달리다가는 호젓한 산자락에서 오토바이를 팽개치고 순식간에 일을 해치워 버린다.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인용한 시들에서도 짐작되듯이 <정말>은 이야기가 풍부하고 능청과 해학이 승한 시집이다. 작정을 하고 독자를 웃기기로 한 듯하다. “조금만 일찍 태어났다면 유랑극단 변사를 했을 것”(한창훈 ‘발문’)이라는 말처럼 이정록 시인은 사석에서도 좌중을 한껏 유쾌하게 만드는 재주를 지녔다. <엄니의 남자> <엄니의 화법> 같은 ‘엄니 시편’들은 그 재주의 상당 부분이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것임을 알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집에 웃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가여운 것들을 향한 안쓰러운 연민은 또한 읽는 이를 울컥하게 만든다. <홍어>는 그중 절창이다.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년이다/ 양쪽 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우눈으로 웃는다//(…)// 얼어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우리집 큰놈은 이제/ 쓸모도 없는 거시기만 남았다고/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막걸리 거품처럼 웃는다”(<홍어> 부분)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시집 제목 ‘정말’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정의 말’ ‘정감 있는 말’이라는 뜻이 아닐까. 아니라면, ‘정록이의 말’은 어떨까. 아마도 그런 의미들이 두루 더해져서 ‘거짓이 아닌 진짜의 말’이라는 뜻을 담게 되었을 게다. 정말 정이 가는 시집이다, <정말>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임병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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