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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해체된 가족의 맨얼굴…대물림되는 비극

등록 2010-04-29 22:59

작가 김주영(71)
작가 김주영(71)
‘있으되 없는’ 아비·‘속절없는’ 어미
시종 냉혹하고 어둑한 필체로 얽어




김주영 8년 만의 새 장편 ‘빈집’

<빈집>(문학동네)은 작가 김주영(71)이 <멸치>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이다. 결손 아닌 결손 가정에서의 성장을 그린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작가의 전작들인 <홍어>(1998) 및 <멸치>(2002)에 이어진다. <홍어>에서는 아버지가, <멸치>에서는 어머니가 집을 비운 상태에서 소년의 성장이 이루어졌다면, <빈집>에서는 아비와 어미가 교대하듯 출분을 거듭하는 집에서 소녀 어진이가 성장한다.

<빈집>은 그러나 한결 어둡고 비극적이라는 점에서 두 전작과 구분된다. 아비가 숨을 놓고 어미는 아예 집을 버린 뒤 십대 후반의 어진이 서너 해 동안 홀로 집을 지키게 되는 상황에 그 비극은 압축되어 있는 셈이다. 어진의 슬픔과 고통은 그것으로 그치질 않거니와, 그 이야기를 마저 하기 전에 우선 비극의 연원을 좇아 이야기를 거슬러올라가 보자.

아비는 좀처럼 집에 붙어 있지 않았다. “오직 떠돌이생활로 일관하려고 작심한 듯”했다. 이따금씩 집에 다니러 올 때에도 남의 눈을 피해 야음을 틈탔으며 기척을 내지 않으려 애썼다. 어린 딸은 그런 아비가 “도둑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도둑은 아니었지만, 아비의 생업은 도둑질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었다. 그가 ‘식구’라고 부르는 동료들과 어울려 화투판을 전전하는 게 그의 일이었고, 몇 건의 사기 도박 혐의가 따라붙어 있었다.

그 아비를 속절없이 기다리며 고명딸 어진이를 학대하고 폭행하는 것이 어미의 일이었다. 아비를 잡으러 다니는 형사를 따돌리는 일이 그에 보태졌다. 급기야 어미와 조 형사 사이에는 수상쩍은 비밀도 자라난다. 아비가 병으로 죽은 뒤에는 빚쟁이들을 피해 어미 자신 집을 떠나 외지로만 떠돌았으며 결국은 딸이 혼자 지키고 있던 집까지 대책 없이 팔아넘기기에 이른다.

그 어미가 아비에게는 두 번째 부인이었다. 첫 부인에게서 딸을 하나 얻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박을 놓았다. 병석에 누운 아비는 이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처자식을 공연히 내쫓은 못된 전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겠나.”

어진이보다 열서너 살쯤 더 먹은 그 배다른 언니의 이름은 수진이. 소설은 어진이, 죽기 직전 아비가 알려준 대로 수진이 살고 있는 바닷가 횟집을 찾아가 두 사람이 처음 대면하는 장면으로 문을 연다. 살던 집이 남에게 넘어간 뒤 쫓기듯 중매결혼을 했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로부터 무작정 뛰쳐나온 어진이었다. 내심 유일한 혈육인 이복 언니와 서로 의지하면서 살 수 있을지 여부를 탐색하고자 했던 것.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그곳에서 몇 달 동안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지켜본바 수진의 결혼 생활 역시 평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진의 남편은 손수 잡은 활어를 납품하던 도회지의 식당 여주인과 배가 맞아 종내는 집을 나가 버리고 만다. 그런데도 “엄마가 가던 그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수진은 식당 여자를 찾아가 따질 염도 내질 못한다.


아비가 남긴 유산은 이토록 참혹했다. 수진 모녀에 관해 고백하면서 그는 “모든 게 내 탓”이라고 했는데, 사실이 그러했다. 수진 모녀만이 아니라 어진 모녀의 일그러진 삶 역시 그가 빚은 죄업에 연원을 두었다 해야 하리라. <홍어>나 <멸치>에서는 낭만주의적 일탈로 포장되었던 ‘아비의 부재’라는 사태가 여기서는 무책임과 가해라는 맨얼굴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앞의 두 소설에서 자연의 묘사에 동원되곤 했던 서정적인 문장들을 <빈집>에서는 만나기 힘들다.

소설 말미에서 수진이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 두 이복자매는 정처 없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길에서 어진은 자신이 수진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생각이었다. 독자로서는 이 불행한 자매가 자신들의 불행을 아교풀 삼아 끈적한 자매애로 맺어지는 결말을 예상할 법하다. 그러나 그런 독자의 의표를 찌르기라도 하듯 소설은 수진의 자살이라는 급작스러운 파국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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