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에서 영성으로〉
베스트셀러 읽기 /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열림원·1만5000원 “나는 나의 믿음을 교토에서 찾고, 하와이에서 만나, 한국에서 행하는 과정으로 작은 쉼표를 찍었던 셈이지요.” 평생을 작가, 평론가, 교수, 문화기획자로 활동해온 무신론자 이어령(76) 전 문화부장관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그의 나이 일흔셋이던 3년 전.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그가 1년간 홀로 일본 교토에 가 있던 2004년부터 2007년 7월24일 세례를 받은 직후까지 쓴 일기와 강연과 각종 매체에 쓴 기사 등을 통해 무신론자가 왜, 어떻게 기독교 신자가 됐는지 그 내밀한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특유의 섬세하고 감각적인 필치와 박학이 존재론적 고뇌와 버무려진 이 책이 지난 3월10일 초판 1쇄를 낸 지 두 달여 만에 15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미국에서 결혼해 변호사, 검사로 일하다 갑상선암으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딸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지닌 자폐증 아들 치유를 위해 건너간 하와이에서 이번엔 실명 위기에 처하자 이 전 장관은 이렇게 신한테 간구한다. “만약 민아(딸)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 있게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원래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아버지도 신자가 되기를 소망했던 딸의 병은 다시 기적처럼 나았고 그는 약속대로 기독교의 하느님에게 귀의했다. 분명 이 전 장관은 사랑하는 딸 때문에, 딸에게 닥쳐온 생사의 고비를 넘는 불행들과의 조우를 통해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내 문학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분이라면 딸 때문에 신앙을 가지게 됐다는 것은 근인이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20대부터 나는 돈이나 가난, 또는 권력, 전쟁에서 비롯된 생명이나 안일에 대한 결핍에서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절실한 고독, 내가 혼자라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처럼 느꼈던 교토의 한 연구소에서 고독했던 생전의 아버지 모습을 회상하며 되짚는 자신의 근원적 고독과 ‘메멘토 모리’, 딸과 딸이 의지했던 목사와의 인연이 만들어낸 기독교로의 무한접근 과정. 그리고 하와이에서의 결단. 결단 이후 한국 일상 속의 기독교 관련 강연과 간증. 여기에 파란만장했던 딸의 간증과 신앙에 관한 이 전 장관의 문답식 단상들을 덧붙였다. 매스컴은 이 전 장관의 세례를 “지금까지 쌓아온 인본주의적인 작업을 뒤로하고 지성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례로 들어가는 순간”이라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례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달라졌다면서도 그는 “머리로는 받아들였지만 아직 성령을 체험하지는 않았다”고도 하고 “나처럼 먹물에 찌든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백 퍼센트 신자는 못 된다”고도 한다. “하루에도 몇 번 밤에 자다가도 불현듯 회의와 참회를 되풀이하면서 살지요. 문지방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자신이 딱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빛과 어둠 사이의 황혼이 아름답듯이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의 문지방에는 긴장의 노을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던 한 저명한 무신론자의 ‘회개’, 하지만 세례 이후에도 멈출 수 없는 ‘먹물’로서의 근원적 회의, 그리고 참회의 연속, 그 아슬아슬한 긴장. 여기에 시작(詩作)까지 가미된 뛰어난 문장력. 이 정도면 <지성에서 영성으로>가 단기간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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