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노벨상 작가 오르한 파묵 신작
이루지 못한 사랑의 흔적 수집
박물관 꾸미는 남자의 ‘순애보’
이루지 못한 사랑의 흔적 수집
박물관 꾸미는 남자의 ‘순애보’
〈순수 박물관 1, 2지음/·1만1500원〉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민음사·각 권 1만3000원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2006년 노벨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58)의 2008년작 소설 <순수 박물관>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인 서른 살 남자 케말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비슷한 처지의 여성 시벨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그러나 약혼식을 코앞에 두고 갓 열여덟 살이 된 가난하지만 매력적인 처녀 퓌순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 행로는 꼬이게 된다. 그는 시벨을 사랑하고 그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지만 퓌순 역시 놓치고 싶지 않아한다. 케말은 이런 상황을 “삶이 내게 관대하게 선사한 희열과 행복”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조급해하지 않고 만끽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용문에서 언급한 행복의 순간은 1975년 5월26일 월요일 오후 3시15분을 가리킨다. 케말과 퓌순은 케말의 아파트에서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는 중이다. 케말이 퓌순의 왼쪽 귀를 살짝 깨물었을 때 퓌순의 귀에서 귀걸이가 떨어져 나간 순간이 바로 이 시각이다.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케말은 믿었으나 그 믿음은 순진하지 않으면 일방적이었다. 케말과 시벨의 화려한 약혼식을 지켜본 퓌순이 연락을 끊고 잠적하면서 케말의 행복은 순식간에 고통으로 몸을 바꾼다.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 케말은 물건들에 집착한다. “행복한 순간들 이후에 남겨진 물건은 그 순간의 기억, 색깔, 보고 만지는 희열을, 그 행복을 느끼게 해 준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퓌순의 왼쪽 귀에서 떨어져 나온 귀걸이 한 짝을 필두로 케말의 수집이 시작된다. 퓌순의 꽃무늬 손수건, 퓌순이 피웠던 담배꽁초와 재떨이, 퓌순이 사용했던 찻잔, 그가 퓌순에게 선물했던 학생용 자, 퓌순의 집 현관 벨…. 그렇게 케말이 수집한 퓌순의 흔적들이 모여 이룬 것이 바로 책 제목이 된 순수 박물관이다.
약혼식이 있기 전, 케말과 퓌순이 사랑을 나누었던 시간은 44일이었다. 약혼식 이후 소식이 끊겼던 퓌순이 케말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 와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은 1976년 5월19일 수요일 저녁. 339일 만의 재회였다. 그가 퓌순의 소재를 절망적으로 찾아 헤매는 동안 관용과 인내로 그를 지켜보던 시벨은 결국 지쳐서 그를 떠난 뒤였다. 그러나 다시 만난 퓌순이 그 사이 결혼했다는 사실은 소설을 또다른 국면으로 끌고 간다.
그로부터 7년 10개월, 2864일 동안 케말은 퓌순이 남편 및 부모와 함께 사는 집에 1593번 저녁을 먹으러 간다. 케말의 방문은 물론 퓌순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 그가 내린 사랑의 정의를 보라. “사랑은 퓌순이 도로, 인도, 집, 정원 그리고 방을 거닐 때, 야외 찻집, 식당 그리고 저녁 식탁에 앉아 있을 때, 그녀를 바라보는 케말이 느끼는 애착을 일컫는 말이다.” 바라보는 것을 넘어 퓌순을 만지고 싶었던 그는 퓌순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물건들을 수집하는 것으로 욕망을 대신 해소한다. 립스틱, 소금 통, 양은 수저, 아이스크림 콘, 사이다 병, 자명종과 손목시계, 모과 강판, 화장수 병, 통조림 따개, 해바라기기름 병 등이 수집 목록에 들어온다.
처음 만나 사랑했던 때로부터 10년 가까운 기다림의 세월 끝에 케말과 퓌순은 마침내 결혼이라는 형식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이토록 애틋한 사랑은 결코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뜻일까. 두 사람의 사랑은 마지막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암초에 부닥쳐 좌초한다.
‘박물관은 역사의 무덤’이라는 관찰에 기대어 말해 보자면, 케말이 세우고자 했던 순수 박물관은 그와 퓌순의 순수한 사랑과 행복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는 강조한다. “모든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케말의 이 말이 <새로운 인생>과 <눈>의 작가 오르한 파묵에게 건네진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렇다. 케말은 순수 박물관에 전시될 물건들에 얽힌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써 달라고 파묵에게 부탁했으며, 이 소설 <순수 박물관>은 바로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케말과 퓌순의 사랑의 무대였던 이스탄불에는 올 8월 말에 실제로 순수 박물관이 문을 연다고도 하는데, 책 안에는 그 박물관의 1회 무료 입장권도 들어 있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민음사 제공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민음사·각 권 1만3000원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2006년 노벨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58)의 2008년작 소설 <순수 박물관>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인 서른 살 남자 케말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비슷한 처지의 여성 시벨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그러나 약혼식을 코앞에 두고 갓 열여덟 살이 된 가난하지만 매력적인 처녀 퓌순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 행로는 꼬이게 된다. 그는 시벨을 사랑하고 그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지만 퓌순 역시 놓치고 싶지 않아한다. 케말은 이런 상황을 “삶이 내게 관대하게 선사한 희열과 행복”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조급해하지 않고 만끽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용문에서 언급한 행복의 순간은 1975년 5월26일 월요일 오후 3시15분을 가리킨다. 케말과 퓌순은 케말의 아파트에서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는 중이다. 케말이 퓌순의 왼쪽 귀를 살짝 깨물었을 때 퓌순의 귀에서 귀걸이가 떨어져 나간 순간이 바로 이 시각이다. 그 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케말은 믿었으나 그 믿음은 순진하지 않으면 일방적이었다. 케말과 시벨의 화려한 약혼식을 지켜본 퓌순이 연락을 끊고 잠적하면서 케말의 행복은 순식간에 고통으로 몸을 바꾼다. 그 고통을 견디기 위해 케말은 물건들에 집착한다. “행복한 순간들 이후에 남겨진 물건은 그 순간의 기억, 색깔, 보고 만지는 희열을, 그 행복을 느끼게 해 준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퓌순의 왼쪽 귀에서 떨어져 나온 귀걸이 한 짝을 필두로 케말의 수집이 시작된다. 퓌순의 꽃무늬 손수건, 퓌순이 피웠던 담배꽁초와 재떨이, 퓌순이 사용했던 찻잔, 그가 퓌순에게 선물했던 학생용 자, 퓌순의 집 현관 벨…. 그렇게 케말이 수집한 퓌순의 흔적들이 모여 이룬 것이 바로 책 제목이 된 순수 박물관이다.
〈순수 박물관 1, 2지음/·1만1500원〉
‘박물관은 역사의 무덤’이라는 관찰에 기대어 말해 보자면, 케말이 세우고자 했던 순수 박물관은 그와 퓌순의 순수한 사랑과 행복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는 강조한다. “모든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케말의 이 말이 <새로운 인생>과 <눈>의 작가 오르한 파묵에게 건네진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렇다. 케말은 순수 박물관에 전시될 물건들에 얽힌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써 달라고 파묵에게 부탁했으며, 이 소설 <순수 박물관>은 바로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다. 케말과 퓌순의 사랑의 무대였던 이스탄불에는 올 8월 말에 실제로 순수 박물관이 문을 연다고도 하는데, 책 안에는 그 박물관의 1회 무료 입장권도 들어 있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민음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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