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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수복지구 소녀 순이가 본 전쟁과 근대

등록 2010-06-25 21:29

이경자(62)
이경자(62)
풍성한 토박이말과 비유로
강원도 양양 일가족 삶 엮어
‘빨갱이 타령·성차별’ 성찰케
〈순이〉
이경자 지음/사계절·9800원

이경자(62)의 소설 <순이>는 작가의 고향인 강원도 양양에서의 어린 시절로 독자를 데려간다. 삼팔선 이북으로, 남북 분단 직후에는 북한 지역이었다가 휴전 뒤 남한에 편입된 ‘수복지구’의 풍경이 풍성한 입말과 더불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순이〉
〈순이〉

여섯 살 소녀 순이는 남동생 철이처럼 “고거 하나 안 달고 나왔다고” 어머니에게 늘 괄시와 학대를 받는다. “어머니는 왜 이토록 딸이 미운지, 왜 당찮은 욕을 뱉고 싶은지, 한번 욕을 하면 왜 멈출 수가 없는지, 스스로도 가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태도를 바꾸지 못한다. “내가 닐 미워하는 줄 아너? 난 니가 안 미워! 니가 괄시받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거여”라고 어머니는 딸에게 말하는 것인데, 그 마음이 딸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 어머니는 장거리에 옷수선집을 내고 군복 수선을 하느라 바쁘고, 할머니가 순이의 엄마 노릇을 대신한다. 걸핏하면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는 무서운 아버지, 점잖지만 할머니를 무시하는 할아버지, 그리고 드러내놓고 아들과 딸을 달리 대하는 어머니는 이 집안을 지배하는 고약한 성차별 의식의 서로 다른 표현들인 셈이다. <절반의 실패> <사랑과 상처> 같은 소설에서 강렬하게 표출되었던 페미니즘적 작가 의식의 연원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당한 폭력을 딸을 학대하고 시어머니를 얕보는 것으로 상쇄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순이와 함께 집안의 가장 낮은 존재다. 두 사람 사이에 진한 정서적 유대가 생기는 게 이상한 노릇은 아닌 것이다. 할머니는 남들의 눈을 피해 순이에게 군음식을 챙겨 주며, 어미에게 내침당한 손녀를 치마폭에 품어 준다. 할머니의 존재는 순이의 우울한 유년기를 따뜻한 봄볕처럼 포근하게 감싼다.

성당 관사에 사는 또래 친구 영이는 순이에게는 바깥으로 열린 창과도 같다. 순이는 영이를 통해 껌이라는 문명의 맛을 처음 접하고, 미국과 천당(또는 미국이라는 천당)의 존재에 입문하며, 노랑머리 파랑눈인 미국 신부의 생활을 엿보게 된다.


50년대 전후(戰後)라고는 해도 전쟁이 어린 소녀의 의식에 심각한 상흔을 남긴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형제 둘이 인민군과 국군으로 나뉘어 불려 간 뒤 소식이 끊긴 일이라든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북으로 올라간 뒤 빨갱이 집안이라며 따돌림을 받는 동갑내기 분이네의 처지는 순이의 마음에도 어쩔 수 없는 그늘을 드리운다.

“시방 휴전이 된데다가 여기가 번연히 남쪽 땅이구만, 뭘 어찌라구 안죽꺼정 빨개이 타령이너? 그래서 시방 누굴 덕 뵈겠다구!”

분이와 분이네를 두고 빨갱이 운운하는 할머니를 향해 할아버지는 이렇게 내쏘듯 말하는 것인데, 이 말은 그 시절로부터 반세기 남짓 지나도록 전가의 보도처럼 빨갱이 타령을 주워섬기는 무리에게 고스란히 돌려줄 법하다. 그럼에도 남들의 눈을 피해 내려와 집에 숨어 있던 분이 아버지가, 순이가 무심코 흘린 한마디로 인해 간첩으로 붙잡혀 가고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상황은 그 빨갱이 타령이 지닌 현실적 위력을 슬프게 확인시킨다.

말캉(전부), 마숩너(맛있냐), 구람(도토리), 여가리(옆, 귀퉁이), 멀갱이(바보), 고댕이(언덕) 같은 정겨운 토박이말, 그리고 “순이는 할머니 치마폭에서 메뚜기처럼 튀어나왔다” “마치 깊은 개울 속에 혼자 들어가서 어디로 헤엄쳐 나가야 할지 모를 때처럼 무섭고 슬펐다” “한여름 감자 썩히는 항아리에 괴어오르는 거품 같았다” 같은 살아 있는 비유는 책읽기의 재미를 한층 더해 준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사계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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