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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박 바로보기, 그리고 전지구적 억압구조 깨기

등록 2005-06-16 17:30수정 2005-06-16 17:30

 스피박 넘기<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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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박 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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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출신의 세계적인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63) 관련서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간되었다. 스피박 자신의 저서인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1999)이 영문학자 태혜숙씨와 박미선씨의 공역으로 나왔고, 스피박 이론 개설서인 <스피박 넘기>(스티븐 모튼 지음)도 이운경씨의 번역으로 소개되었다. 오는 20~24일 서울에서 열리는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에 스피박이 참가할 예정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겠는데, 아쉽게도 스피박의 참가는 취소되었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인도 태생으로 캘커타대학에서 영문학과 벵골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코넬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고 1991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콜럼비아대학 교수로 있다. 1976년에 프랑스의 해체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주저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번역, 소개함으로써 영미 (문)학계에 화려하게 등장한 이후 해체론,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 문화론을 가로지르는 이론 작업과 현실적 발언을 병행하고 있는, ‘스타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흔히 그는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로 알려져 있지만, 어떤 이는 그를 가리켜 ‘페미니스트적 마르크스주의 해체론자’라 일컫기도 했다. 이처럼 적어도 네 가지의 이론적·실천적 지향을 한 몸에 거느리고 있다는 데에 ‘스피박 현상’의 문제성이 있다. 그는 자신이 주창한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서발턴(subaltern·하위주체)’을 묘사하고 옹호하는 데에 이 네 가지 이론과 방법론을 자재로이 써먹는다. 여기서 ‘자재롭다’는 것은 나쁘게 말하면 ‘일관성이 없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예컨대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해체론과 페미니즘을 동원하는가 하면, 서구 페미니즘을 공격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경제 이론에 기대기도 하며, 해체론과 프랑스 지식계를 비판하는 데에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식민주의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특정한 이론의 정합성과 완결성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현실적 필요성과 적용 가능성 여부이기 때문이다.

그가 여성, 노동자계급, 피식민지인과 같은 기왕의 어휘들을 버리고 ‘서발턴’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동원하는 것은 특정한 하나의 이론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볼 수 있다. 여성이니 노동자계급이니 피식민지인이니 하는 기존의 용어들은 억압자들과 억압 체계에 저항하는 일관된 정치적 정체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스피박이 보기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런 ‘정치적 지배단어들’이 끌어안지 않고 밖으로 내치는 인자들이다. ‘서발턴’은 이처럼 영향력 있는 정치담론들로 규정되지 않는, 다양한 종속적 처지를 아우르고자 고안된 용어다. 당연히 단일한 의미와 맥락에 한정되지 않고 ‘그때그때’ 달리 해석되는데, 스피박 자신은 “이 말에 이론적인 엄격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인도출신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
새로운 개념 ‘서발턴(하위주체)’ 동원해
여성, 노동자 외 다양한 ‘종속적 처지’ 다뤄
“푸코·들뢰즈 한발 물러섰다” 비판
이론작업과 현실적 발언 병행

스피박이 제기하는 또 다른 딜레마는 그의 까다로운 문체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 테리 이글턴은 스피박의 대표작이라 할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을 두고 ‘고의적인 이론상의 불명료함, 비유상의 혼란, 고압적인 전문어 사용’ 등을 비판한 바 있다. 스피박 자신은 이에 대해 ‘평이한 글에는 속임수가 있다’는 말로 반박했다. 독일 사상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글쓰기 철학을 연상시키는 대목인데, 흥미로운 것은 스피박이 자신의 난해한 글쓰기를 통해서야말로 제3세계 여성들을 비롯한 ‘서발턴’의 경험과 역사를 ‘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스피박에게 우호적인 논평가들은 그의 문체의 난해성이 서로 다른 이론 체계들 사이의 차이와 불연속성을 화해시키지 않고 온존시키려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새로 출간된 두 권의 책 가운데 <스피박 넘기>는 그의 까다로운 문체의 벽을 ‘넘어’ 스피박 사상의 알짬에 접근할 수 있도록 친절히 안내하는 입문서다. 현단계 학계에서 ‘스피박 현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해체론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에서 그가 가져 온 것과 되돌려 준 것은 무엇인지, ‘서발턴’이라는 개념의 유래와 실제 등을 조목조목 알려준다.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에서 스피박은 철학, 문학, 역사, 문화의 네 장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이 책에는 특히 논란을 낳은 그의 논문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가?>(1988)를 수정한 글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글에서 그는 ‘주체’를 가장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푸코와 들뢰즈 같은 이들이 엄존하는 전지구적 차별과 억압 구조에 눈을 감은 채 ‘이제 서발턴들이 말할 수 있다’며 한 발 뒤로 빼는 것은 서발턴들을 한층 더 깊은 침묵 속에 밀어 넣을 따름이라고 비판한다. 스피박이 한국의 ‘콘트롤데이터’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라든가 인도의 벵골어 작가 마하스웨타 데비의 소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서발턴들을 침묵으로부터 끌어 올리기 위한 그 나름의 ‘비평적 개입’이라 할 수 있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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