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연인〉
잠깐독서 /
〈백야의 연인〉
옛 남자를 잊지 못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어머니. 수완은 서른여섯이 되던 해 가을, 불쑥 어머니의 옛 남자를 찾아 모스크바로 떠난다. 그곳에서 수완은 자신이 찾던 어머니의 옛 남자와 마주하는 대신, 피할 수 없는, 아니 절대로 피해가고 싶지 않은 운명과 마주한다.
스베틀라나. 작은 체구에 대리석을 음각으로 파놓은 듯한 얼굴, 깊은 눈매와 우수 밴 말투를 가진 러시안-알타이계 혼혈 여인. 그는 스베틀라나를 낯선 땅에서 누리는 익명의 자유로움이나 일탈이 아닌, 지나온 시간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싶은 운명으로 생각했다. “아가야. 남자는 늘 먼 곳을 바라본단다. 보이지 않는 것,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면서 말이지.” 스베틀라나 역시 평생 한 남자 주변을 서성였던 어머니의 이런 충고를 배반하며 수완을 받아들였다. 오랜 세월 자신을 휘감아왔던 곰삭은 평화를 깨고, 한순간 맞닥뜨린 이 뜨거운 운명을 받아들이려 한 두 사람의 발목을 잡은 건, 결국 그 뜨거움이 식어 싸늘한 권태로 돌아올 거라는 본능적 불안감이다. 언젠가는 ‘사랑의 마법’이 풀리는 ‘먼 훗날’이 닥쳐올 것이고, 그때 찾아오는 영원한 엇갈림에 대한 불안감.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그 반대편에 있을 것을 선택”하는 것이, 인생의 오류인지 아닌지 작가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두 연인 옆을 스치던 그 무표정한 모스크바 사람들과, 을씨년스러운 10월 모스크바의 거리가 반복해서 묘사될 뿐이다. 정길연 지음/랜덤하우스·1만원.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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