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
“통념과 달리 형법보다 민법이 발달”
말리노프스키의 생생한 법인류학
최초 참여관찰 통한 편견 없는 기록
말리노프스키의 생생한 법인류학
최초 참여관찰 통한 편견 없는 기록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지음·김도현 옮김/책세상·6900원 ‘책세상문고·고전의 세계’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은 현대 인류학의 창시자인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사진·1884~1942)의 법인류학 저작이다. 이 책에서 말리노프스키는 원시사회에서 작동하는 법을 생동감 있게 드러낸다. 국가도 없고 법원도 경찰도 없지만, 이 사회를 규율하는 법적 장치가 나름대로 정교하게 발달돼 있음이 말리노프스키의 연구를 통해 드러난다. 특히 금기와 처벌이라는 종교적 형식의 ‘형법’이 중심일 거라는 통념과 달리, 구성원들의 경제 관계를 규제하는 ‘민법’이 상대적으로 더 발달돼 있음도 이 연구에서 밝혀진다. 말리노프스키는 처음부터 인류학을 연구한 사람이 아니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말리노프스키는 수학과 자연과학 분야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제임스 프레이저의 유명한 인류학 고전 <황금가지>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영국 런던정경대학에서 인류학 공부를 시작했다. 말리노프스키 생애의 일대 전환점은 1차대전(1914~1918) 중에 찾아왔다. 이 시기에 그는 남태평양 뉴기니섬 북동쪽 트로브리앤드군도 원주민들의 삶을 조사했다. 그의 조사방법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말리노프스키는 원주민들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천막을 치고 2년 동안 그들과 함께 살았다. 또 원주민의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해 그들의 생각과 의견을 생생하게 이해했다. 이로써 그는 19세기 ‘안락의자 인류학’과 결별하고 현대 인류학의 이정표를 세웠으며, 그가 처음으로 행한 ‘참여 관찰’은 이후 인류학 연구의 보편적인 방법으로 정착했다. 그 ‘참여 관찰’의 결과 가운데 하나가 이 책이다.
말리노프스키가 관찰 대상으로 삼은 트로브리앤드 원주민 사회는 초보적인 농경과 어로를 생계 수단으로 삼아 살아가는 부족사회다. 바닷가 원주민은 카누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며, 내지인들은 밭을 일구어 얌(고구마와 비슷한 작물)을 키운다. 말리노프스키는 이 연구에서 기존 인류학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가정들을 통렬하게 논박한다. 기존 인류학은 미개사회에는 민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며, 법적 사실이라고는 가끔씩 발생하는 관습의 위반, 곧 범죄밖에 없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말리노프스키는 현지 조사를 통해 이런 가정이 근거가 없으며 원시사회에 형법보다는 민법이 더 발달해 있음을 보여준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연구가 ‘인류학이 만든 허수아비’를 날려버렸다는 데 있다. 그때까지 인류학은 미개인들이 관습에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거의 무의식적으로 복종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관습이 강요하는 질서를 맹종하는 것이 미개인의 법적 현실이라고 가정했던 것인데, 말리노프스키는 이런 가정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밝혀낸다. 미개사회의 구성원들은 자동인형처럼 관습을 준수하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판단해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트로브리앤드 원주민 사회의 법적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계제’라는 이 사회의 근간적 질서다. 이 모계사회에서 혈통은 모계 중심으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자식에 대해 아무런 법적 권한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권리를 행사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권리는 어머니의 남자형제인 외삼촌에게 있다. 외삼촌은 권리의 주체이자 의무의 주체이기도 하다. 외삼촌은 여동생과 조카를 먹여살리는 존재이며, 재산이나 지위도 조카에게 물려준다. 아버지는 이 관계의 바깥에 놓인 이방인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라 조카와 연결된다.
민법적 질서는 이 모계적 관계에서 발생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호혜성’이다. 외삼촌은 밭에서 생산한 얌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더미로 쌓아올린 뒤 그것은 조카네 집으로 보낸다. 외삼촌네는 아들의 외삼촌에게서 얌을 받는다. 이 선물과 증여의 순환이 평형을 이루어 이 사회의 안정된 경제적 질서를 만든다. 그런데 이 호혜적 관계는 ‘전시성’이라는 의미심장한 성격을 품고 있다. 얌 생산자는 가장 좋은 것을 최대한 많이 증여함으로써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한다. 관대함은 최고의 미덕이다. 사람들은 쌓아놓은 얌 더미의 크기와 품질을 보고서 당사자를 칭찬하거나 비난한다. 비난을 피하고 칭찬을 받으려는 그 허영심과 자존심 때문에 사람들은 증여 의무를 더욱 충실히 지키게 된다.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이 의무를 밀고 가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리노프스키가 강조하는 것이 누구나 자동적으로 증여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위신을 잃지 않고 이득을 상실할 염려 없이 의무를 회피할 수 있다면 원주민들은 언제나 그렇게 한다. 그들은 문명사회의 사업가와 다를 바 없다.” 원주민들이 의무를 준수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결국 사회 바깥으로 쫓겨나기 때문이다. 문명인 못지않게 트로브리앤드 원주민들도 할 수만 있다면 의무를 피하려고 하고 또 의무를 이행할 때는 거들먹거리거나 젠체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 책은 이렇게 미개인을 터무니없이 이상화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실제 그대로 이해하려 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지음·김도현 옮김/책세상·6900원 ‘책세상문고·고전의 세계’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은 현대 인류학의 창시자인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사진·1884~1942)의 법인류학 저작이다. 이 책에서 말리노프스키는 원시사회에서 작동하는 법을 생동감 있게 드러낸다. 국가도 없고 법원도 경찰도 없지만, 이 사회를 규율하는 법적 장치가 나름대로 정교하게 발달돼 있음이 말리노프스키의 연구를 통해 드러난다. 특히 금기와 처벌이라는 종교적 형식의 ‘형법’이 중심일 거라는 통념과 달리, 구성원들의 경제 관계를 규제하는 ‘민법’이 상대적으로 더 발달돼 있음도 이 연구에서 밝혀진다. 말리노프스키는 처음부터 인류학을 연구한 사람이 아니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말리노프스키는 수학과 자연과학 분야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제임스 프레이저의 유명한 인류학 고전 <황금가지>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영국 런던정경대학에서 인류학 공부를 시작했다. 말리노프스키 생애의 일대 전환점은 1차대전(1914~1918) 중에 찾아왔다. 이 시기에 그는 남태평양 뉴기니섬 북동쪽 트로브리앤드군도 원주민들의 삶을 조사했다. 그의 조사방법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말리노프스키는 원주민들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천막을 치고 2년 동안 그들과 함께 살았다. 또 원주민의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해 그들의 생각과 의견을 생생하게 이해했다. 이로써 그는 19세기 ‘안락의자 인류학’과 결별하고 현대 인류학의 이정표를 세웠으며, 그가 처음으로 행한 ‘참여 관찰’은 이후 인류학 연구의 보편적인 방법으로 정착했다. 그 ‘참여 관찰’의 결과 가운데 하나가 이 책이다.
현대 인류학의 창시자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1884~1942)
민법적 질서는 이 모계적 관계에서 발생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호혜성’이다. 외삼촌은 밭에서 생산한 얌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더미로 쌓아올린 뒤 그것은 조카네 집으로 보낸다. 외삼촌네는 아들의 외삼촌에게서 얌을 받는다. 이 선물과 증여의 순환이 평형을 이루어 이 사회의 안정된 경제적 질서를 만든다. 그런데 이 호혜적 관계는 ‘전시성’이라는 의미심장한 성격을 품고 있다. 얌 생산자는 가장 좋은 것을 최대한 많이 증여함으로써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한다. 관대함은 최고의 미덕이다. 사람들은 쌓아놓은 얌 더미의 크기와 품질을 보고서 당사자를 칭찬하거나 비난한다. 비난을 피하고 칭찬을 받으려는 그 허영심과 자존심 때문에 사람들은 증여 의무를 더욱 충실히 지키게 된다.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이 의무를 밀고 가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리노프스키가 강조하는 것이 누구나 자동적으로 증여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위신을 잃지 않고 이득을 상실할 염려 없이 의무를 회피할 수 있다면 원주민들은 언제나 그렇게 한다. 그들은 문명사회의 사업가와 다를 바 없다.” 원주민들이 의무를 준수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결국 사회 바깥으로 쫓겨나기 때문이다. 문명인 못지않게 트로브리앤드 원주민들도 할 수만 있다면 의무를 피하려고 하고 또 의무를 이행할 때는 거들먹거리거나 젠체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 책은 이렇게 미개인을 터무니없이 이상화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실제 그대로 이해하려 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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