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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개성 만점 열세 작가의 단편 나들이

등록 2010-10-08 19:30

끝까지 이럴래?
한창훈 박민규 최진영 외 지음/한겨레출판·1만2000원

한겨레신문사가 장편문학상을 처음 시행한 것은 1995년, 해방 50돌을 기념해서였다. 권현숙의 <인샬라>가 수상작으로 선정되었고,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데 이어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듬해인 1996년부터는 아예 ‘한겨레문학상’을 제정해 해마다 시상해 오고 있다. 시행 첫해에 수상작을 내지 못한 것은 그만큼 엄정한 심사 잣대를 들이대겠노라는 뜻을 밝힌 것으로 헤아린다.

시행 두 해째인 1997년 드디어 김연의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를 수상작으로 삼으면서 한겨레문학상의 역사는 본궤도에 올랐다. 그 뒤 5회째인 2000년도에 수상작을 내지 못한 것을 제하고는 올해 15회까지 모두 열세 명의 수상자를 배출하면서 한국 문학의 속살을 찌우는 데 이바지했다. 그 미쁜 이름들을 우선 차례대로 적어 둔다. <홍합>(한창훈)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김곰치) <물의 말>(박정애) <나의 아름다운 정원>(심윤경)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박민규) <싸이코가 뜬다>(권리) <도모유키>(조두진)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조영아)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서진) <무중력증후군>(윤고은) <열외인종 잔혹사>(주원규)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최진영).

해마다 7월 중순께 새내기 당선자가 나오면 시상식에서 얼굴을 마주치고 축하연에서 술잔을 나누곤 했던 이들이 작심하고 책 한 권을 함께 내놓았다. 박민규의 작품을 표제로 삼은 합동작품집 <끝까지 이럴래?>에는 이 장편 작가들이 이 책을 위해 새로 쓴 단편 열셋이 오롯이 묶였다. ‘단독자의 진정성’.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이 개성 넘치는 작가들의 단편들을 아우르는 말로 이런 표현을 썼다. 한겨레문학상이 특정 유파나 경향에 치우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작품성과 창의성을 최우선으로 삼아 왔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일 수도 있겠다. 몇 작품을 읽어 보자.

박민규의 작품에서 아래위층에 사는 애덤스와 에드워드 창은 지구 멸망 전날 층간 소음 문제를 따지려다가 술을 마시며 밤을 함께 보낸다. 기정사실화한 종말을 코앞에 두고도 바깥세상에서는 욕망과 쟁투의 아수라장이 이어지고, 두 사내는 “우린 끝까지 최선을 다한 인간들이었”노라는 자부와 위안의 말을 주고받지만, 그 말이 감추고 있는 허위와 가식을 향해 작가는 일갈하는 듯하다: ‘끝까지 이럴래?’

같은 말을 주원규 소설 <컴백홈>(come back home)의 아빠에게 돌려주고 싶다. 3년 전 의문의 차 사고로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던 아빠가 갑자기 가족들 앞에 나타난다. 그사이 아빠 자리에는 그의 부하 직원이었던 새아빠가 들어와 있는데 말이다. 돌아온 아빠는 새아빠를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고 엄마를 강탈한 것도 모자라 중학생 딸을 상대로 근친상간을 강요한다. 견디다 못한 ‘새’ 가족들은 아빠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주”기로 한다.

윤고은의 <1/4>에서 부부와 장성한 두 딸로 이루어진 “우리 가족은 네 등분되었다.” 아빠의 파산을 계기로 부부는 이혼하고 두 딸은 각각 독립한 것이다. 막내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 소설에서 그러나 상황을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태도는 지극히 담담하다. 언니의 결혼을 앞두고 홈파티용 빌라를 빌려서 행복한 가족을 잠깐 연기한 뒤 가족은 다시 사등분되지만 그렇다고 크게 슬퍼하거나 자괴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미니홈피의 일촌들과 블로그의 이웃들, 때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로도 1/4을 1처럼 만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당선작의 주인공 소녀로 하여금 세상을 떠돌게 했던 ‘막내’ 최진영이 여기 실린 <월드빌, 401호>에서는 3년 동안 빌라 밖으로 나가지 않은 ‘히키코모리’ 청년을 주인공으로 삼은 점이 이채롭다. 3년 만에 조심스레 빌라 밖으로 나가 본 청년의 눈에 세상은 텅 비어 있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내 세계만 남겨두고 다들”이라 되뇌는 그의 모습에서는 박민규의 표제작이 겹쳐 떠오른다. 이밖에 치매 어머니와 대인기피증 동생을 남겨두고 미국 이민을 떠나는 여자를 등장시킨 심윤경의 <가을볕>, 중학교 졸업으로 헤어진 남녀 동창의 이야기를 환상적 필치로 그린 김곰치의 <졸업>, 천재적인 음악성을 지녔으나 틀에 박힌 교육 때문에 망가지고 마는 소년의 비극을 담은 한창훈의 <그 아이> 등 다른 수록작들 역시 진지하면서도 재미있는 독서 체험을 제공한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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